인도불교 – 불교의 성립 배경

인도불교 – 불교의 성립 배경

지리상으로 인도의 권역(圈域)에서 전개된 불교를 인도불교라고 하며, 인도의 고대언어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전수된 불교를 통칭하여 인도불교라고도 한다.

인도불교의 역사는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그 중 제1단계인 흥륭기(興隆期)는 초기불교시대라 하며, 제2단계인 분파기는 부파불교시대, 제3단계인 발달기는 대승불교시대이고, 제4단계인 쇠퇴기는 밀교시대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인도에 새롭게 등장한 신불교 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으며 그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불교의 성립 배경 1. 역사적 배경 고대 인더스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하여 모헨조다로와 하랏파지역에 번성했던 토착민의 문명은 아리얀(a-ryan)족의 도래와 함께 쇠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얀족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키스탄(Turkestan) 등에 머물던 유목민으로서 기원전 17, 18세기경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입했다.

아리얀족은 이미 철기문명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드라비다족을 흡수, 지배하게 된다.

아리얀족의 도래를 계기로 하여 인도대륙은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고, 농업의 번성과 함께 농산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과 농경용 기구 또는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수공업도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소도시들이 늘어나고 그를 기반으로 새롭게 대두된 자산가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제군주가 출현하여 16대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6대국 중 대부분이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각 나라의 이름은 앙가, 마가다, 카시, 코살라, 밧지, 말라, 체티, 밤사, 쿠루, 판찰라, 맛차, 수라세나, 앗사카, 아반티, 간다라, 캄보자 등이다.

16대국의 통치형태는 군주정치와 공화정치, 둘로 나누어진다.

밧지국과 말라국은 부족 공화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치 형태의 나라였다.

그 중에서 특히 코살라와 마가다가 중심 세력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었다.

도시국가들 간의 정복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마가다국의 빔비사라(기원전 582~554년 재위) 왕은 작은 나라들을 정복, 병합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국가의 형성기에 인도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노예화시키고 아리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민족의식은 독특한 사회계급 제도인 카스트를 성립시켰는데, 이 제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4성(姓) 계급은 다음과 같다.

브라만 : 사제계급. 크샤트리야 : 왕족, 귀족, 무사 등의 지배계급. 바이쉬야 : 상인, 평민계급. 슈드라 : 노예계급. 또한 아리얀족의 종교문화는 지배적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아리얀족의 종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의 성전인 4종의 주요 베다 중에서 『리그베다』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도의 모든 성스런 지혜의 원천으로서 첫째 가는 문헌으로 꼽힌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아리얀족이 드라비다족을 비롯한 토착 원주민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그들의 종교관을 비롯한 관습과 생활문화 전반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쉬바 신앙과 요가행법이다.

특히 요가는 불교에도 채용되어 수행법으로서 널리 쓰였다.

2. 사문교단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가 무너지고,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전통적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혁신 사상가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숲 속에서 수행하였다.

그들은 사문(沙門, sraman톋), 즉 유행자(遊行者)로 불렸는데, 본래 여기저기 방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이를 뜻한다.

사문(沙門)들의 수행공동체를 상가(sam톑ha, 僧伽)라고 한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사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이나교의 개조로 꼽히는 마하비라도 그와 같은 사상적 조류 속에서 성장했다.

사문의 사상은 유물론, 불가지론, 영원 불변론, 일부 불변론, 유한 무한론, 회의론, 원자론 등 수백 종에 이르는 유파를 형성하여, 가히 사상의 홍수시대라 불릴 정도였다.

사문들은 정주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 모양으로 한 벌의 옷만을 걸치거나 나체 상태로 털투성이의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기도 했으며,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길게 기르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혼자서 수행하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이루기도 했으며, 스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제자들이 함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양태를 보였던 사문들의 공통점은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교의 이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가혹하고 불평등한 카스트제도에 반기를 들었고, 각종 의식과 제례, 동물 희생제 등에 반대하였다.

불교와 자이나교 또한 이러한 사문에 의한 반(反)브라만교 운동의 하나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욕망을 떨치고 해탈이라는 초월적인 희구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고행했던 사문은 오랫동안 불교교단에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사문이란 열심히 수행하는 이로서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정진하여 마음의 삼매에 이른다고 한다.

붓다는 사문의 일원으로서 수행을 시작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중도사상을 표방하여 고행수행을 부정하였다.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해탈도 얻지 못한다는 붓다의 깨달음은 새로운 사상의 정립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6세기경에 사문들은 마하비라를 따르는 자이나교단과 고타마 붓다를 따르는 붓다교단으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붓다가 등장하기까지 사문들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교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체계적인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서 정립된 것은 마하비라를 중심으로 한 자이나교단이 최초였다.

붓다 또한 자이나교단의 조직체계를 따라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 발전하는 데는 그다지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붓다 당시의 여러 사상은 서로 간의 대론을 통해서 자웅을 겨루었고 그 흥망이 가려졌다.

그러한 와중에 붓다교단 또한 타 학파와 논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해 나갔다.

붓다의 교법은 사회ㆍ정치적 상위계층에게도 매력적인 사상으로 수용되었으며, 특히 빔비사라 왕의 재위 연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경전 곳곳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빔비사라 왕의 불교 외호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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