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자
-법상스님-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여 생하고 멸하는 것 또한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生),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死)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因)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불[果]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따뜻함(報)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던 것이 아니며, 공기 중에 있던 것도, 비벼주는 손 안에 있던 것 또한 아닙니다.
불은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며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듯, 우리 존재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냇물이 태양이라는 연(緣)을 만나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뭉쳐 구름이 되며 구름이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럽니다.
그렇다고 우린 시냇물이 죽고 수증기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며 수증기가 죽어 구름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그와 같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구름이 없어짐(死)과 동시에 비가 생겨나듯(生) 생하는 순간 멸하는 것이며 멸하는 순간 다시 생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네 죽음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이 껍데기 유효기간이 다 되어 새롭게 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생에서 지은 업에 걸맞는 새로운 껍데기를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부터 생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착하므로 온갖 괴로움이 따라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올바른 이해이며 연기(緣起)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상할 수 있다면 우리네 목숨 없어지는 것에도 여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인생 일대의 명제 앞에 두고 당당히 싸워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조차 이겨 낼 수 있다면 죽음의 관념 조차 텅 비워 방하착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여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는 그 어떤 일상의 괴로움도 그다지 큰 괴로움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짓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생사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인생에서 오는 그 어떤 괴로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이따금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아무리 힘겨운 경계라도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기에 죽음을 초월하는 명상 앞에 더 이상 괴로움은 있지 않습니다.
늘 죽음과 마주하는 삶,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네 생활 수행자들의 첫 번째 마음 자세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