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업도 바꿀수 있나요
-법상스님-
Q: 사람들은 힘들 때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라고 푸념을 합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도 내가 지은 업의 결과를 내가 받는다고 하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이 이미 지어진 업의 결과라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또 업은 반드시 받아야 없어진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업장소멸을 이야기 하는데 이 두가지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닌가요? A: 우리의 과거 행위, 업業으로 인한 과보果報는 현재에 분명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되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그 문제를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업에 따라 부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가난하게 태어날 수도 있으며 재능 있게 태어날 수도 있고 재능 없게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부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벌써 과거에 지어 놓은 복덕, 선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전생의 업에 의해 부자로 태어났어도 이번 생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가난해 질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생의 업을 따라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이번 생에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이번 생에서 부유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업을 이번 생에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가르침이지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운행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나 그 업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무엇에 따라 변하는가 하면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변합니다.
현실에서 짓게 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업장이 튀어나오고 동시에 그 업장을 맑히려는 업장소멸의 의지 또한 생겨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지은 죄업이 적절한 시절인연을 맞으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현실에서 튀어나오게 되지만 그 업이 나오기 전에 기도와 수행과 마음 비움, 용서와 보시와 복덕을 지음으로써 업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더라도 그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악업惡業을 한 숟가락의 소금이라고 보았을 때 한 숟가락의 소금을 그냥 먹기는 너무 짜지만 그 소금을 큰 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거기에 김치와 양념을 곁들여 찌개를 해 먹으면 오히려 한 숟가락의 소금을 맛있게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죄업은 분명 받아야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숟가락의 소금을 먹는 것이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라면 맨 소금을 그냥 먹음으로써 짠 느낌을 고스란히 받을 수도 있지만 물을 더함으로써 조금 덜 짜게 먹을 수도 있고 다른 재료을 넣어 오히려 맛있게 먹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행하는 수행과 보시에 따라, 지혜와 복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받되 오히려 즐겁게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전생에 타인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이번 생에 내게 심한 욕설을 함으로써 우리 둘 사이에 업의 균형이 맞춰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떤 시절인연을 통해 그 과보를 받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즉 내가 수행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나 아주 기쁜 일이 있을 때, 자존감이 한층 올라가 있을 때 심한 욕설을 듣는다면 그것을 듣고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있고 욕을 한 상대를 오히려 자비롭게 용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업장으로 인해 온갖 악재가 겹치고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올 때, 예를 들어 사업이 부도가 나고 몸에 병은 오고 아내와 이혼을 해서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일 때 그 욕설을 듣게 된다면 그 말 한마디로 크게 충격을 받고 절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과거 업의 과보를 받으면서도 어떤 시절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과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도 있고 반대로 큰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과 기도와 보시 등의 아름다운 덕목으로 시절인연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업장을 소멸한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했는데 한편에서는 또 업장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두말은 얼핏 들으면 어패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말이 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번 생에 자유의지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선업과 복을 짓고 마음을 비우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는 등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의 덕목들을 실천함으로써 똑같은 업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받을 수 있으니 그것이 업장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업을 짓지만 내가 짓는 업이 어떤 것인지를 다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직접 보고 경험한 것조차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전생前生의 일이라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다 보니 어떤 원인으로 인해 이런 결과가 맺어졌는지를 모르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인과응보의 세세한 부분까지를 모두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처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야 어쩌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이런 업을 받게 되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수행과 명상, 보시와 나눔, 사랑과 자비, 용서와 비움, 무집착과 무분별 등을 다만 할 뿐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수행 덕목을 통해 우리의 업을 녹이고 나 자신을 비우는 데 더욱 노력하는 것이 바로 업장소멸이며 우리가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