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알라마경
Kālāma-sutt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아라한이고 바르고 완전히 깨달으신 그분 세존에게 귀의 합니다.
) Ⅰ.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1.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누구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기준, 즉 우리가 옳다고 했을 때 시.공간을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기준(universal criteria)은 무엇인가? 1) 내가 옳다고 하는 이것은 보편 타당한 기준에 의해서 바른 것인가? 2) 바르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거를 들어 옳다고 할 수 있는가? 3) 출가 수행자인 우리들은 과연 옳은 길을 선택 한 것인가? 4) 붓다의 가르침이 최고라면 그 최고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5) 진실됨과 헛됨, 참과 거짓,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이것이 우리에게만 국한된 헛된 생활이 아닌지를 보편 타당한 기준을 제시한 붓다의 가르침을 토대로 검토하고자 한다.
2. 경전에서 붓다는 말씀하셨다.
옳다라고 하는 보편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 경전이 ‘kālāma-sutta’이다.
이 경전은 서양인들이 많은 관심과 인용을 했다.
아마도 kālāma족과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이 비슷한 점이 많은가 보다.
그 들은 이 경전을 charter a free a inquiry[자유탐구헌장(선언)]이라 했다.
Ⅱ. kālāma-sutta의 배경 1. 깔라마들에게 하는 법문으로 깔라마들이 묻고 붓다가 답하는 형식의 경전이다.
깔라마들의 성향이 서양인들과 비슷하며 아주 이성적이다.
그 당시 많은 사문들이 깔라마를 방분하여 스스로 잘났고 다른 사람의 말은 다 거짓이라 하지만 깔라마들은 그러냐고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후에 붓다가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붓다에게 묻는다.
모두들 자기 말이 옳고 다른 이의 말은 거짓이라 하는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판단 기준에 대해서 붓다에게 묻는다.
2. 이 경전은 서양인들이 많은 관심과, 인용을 했다.
아마도 kālāma족과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이 비슷한 점이 많으며, 이 경전은 서양인들의 논리적이고 회의론적인 기질에 부합된 경전이라 할 수 있겠다.
Ⅲ. 우리들의 현실에 대한 접근 1. 우리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것이 진실된 것인가? 아니면 헛된 것인가? 수행가풍은 어떤 기준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2. 대승경전의 비불설에 대하여 왜 대승 비불설이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시기적으로 늦으니까 비불설이라고 비판 할 수 있는 것인가? 3. 대승이 후기라는 사실은 누구나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불설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승의 스님들이 깊은 선정에 들어서 깨달은 경지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깨달은 경지를 말하면 다 경전이라 할 수 있는가. 4. 부처님 당시에 깨달은 아라한들 그 누구도 자기의 깨달은 경지를 경이라 하면서 창작하지 않았다.
그 분들의 법문은 모두 테라가타 또는 부처님 경전에 따로 실려있다.
따로 무슨 경전이라 하면서 부처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은 감추고 경전을 편찬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
혹여 그 내용이 수승할 수 있어도 부처님의 입을 빌려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설한 것은 어떤 변명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태도에 대한 비판) 아비담마나 까타왓투등은 제작자 자신의 이름을 밝혀 부처님과 구분하려고 했다.
5. 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사실은 없을까? 신분을 밝히면 그 누구도 받아 들려지지 않을 것이니까 붓다의 입을 빌려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Svakkhāto bhagavatā dhammo(붓다에 의해서 잘 설해진 말씀) 그것이 sutta이다.
sutta란 “붓다에 의해서 잘 설해진 말씀”이라 정의 된다.
담마라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붓다의 입을 빌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의 dhamma와 후대의 아비담마적인 것과 동일시 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떤 태도로 대승경전들을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 선사들의 어록은 그 누구도 비불설론을 거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사들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비불설을 논하지 않고 개인의 깨달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7. 지금은 불설이냐 비불설이냐는 논외로 하고 그것도 또 하나의 부처님의 경전으로 본다.
그러나 그 태도에 대한 비판,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가경 중에서 삼처전심에 대한 문제로 불설대범천왕의 결경(염화시중경)이 있다 1) 이 경은 선불교를 들어내기 위해서 중국에서 후대에 만들어진 경전으로 중국에서는 그 내용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 경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무지의 소산이 아닌가! 부파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붓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창작된 매우 후기의 경전이라 결론짓는다.
8. 초창기는 반야경, 유식경, 정토경, 여래장경, 밀교경 등이 대승 비불설론의 대상이 되는 경전들이다.
9. 바로 이러한 문헌학적, 시기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잣대를 떠나서 붓다가 말씀하신 univesal한 잣대로 이 가경이라 해도 수행 중에 나온 것들이므로 한번쯤은 귀중한 자료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0. 하지만 우리는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으로 붓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우리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경전의 내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Ⅳ. kālāma -sutta을 통한 정법의 평가기준 10가지 1. kālāma들은 꼬살라국에 살고 있는 브라민이 안닌 크샤트리아이다.
그들은 전통에 억매이지 않고 사상적으로 신사조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배운 집단이며,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집단이며, 그들은 자유사상가이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집단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해서 그것에 쏠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결론을 보류하고 옳바른 결론이 나올 때 까지 결론을 짓지 않는 아주 주도 면밀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2. ‘바란두까 깔라마'[1]경에서 붓다는 꼬살라국에서 까필라왓투에 가게 됐고 그곳의 권력가인 ‘마하나마’에게 머물 곳을 부탁한다.
그러나 붓다가 머물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바란두까라는 수행자의 처소에서 머물 것을 권함.[2] 붓다는 ‘마하나마’에게 묻는다.
마하나마여 이 세상에는 3종류의 스승이 있다 첫 째는 kamma(욕계), 즉 욕망에 대해 잘 알고, rupa(물질, 색계)에 대해 잘 모르고 vedana(감수,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은 스승이 있다.
두 번째 kamma와 rupa(물질, 색), 즉 욕망과 선경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vedana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세 번째 kamma, rupa, vedana 셋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고 이야기 한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같은가 다른가를 묻는다.
그러자 바란두까가 같다고 대답하라고 시킨다.
그러나 붓다는 셋은 같지 않다고 한다.
같은 질문과 대답을 세 번 반복한다.
그러자 바란두까는 마하나마가 있는 곳에서 자기에게 창피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
2.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보는 10가지 기준. 붓다가 유행을 하다가 깔라마들이 있는 깔라들의 도시인 깨사뿟따에 들어가셨다.
깔라마들이 붓다에게 질문을 한다.
많은 사문과 바라민들이 이곳에 와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은 비난하고 무시하고 기를 죽이고 자기들만이 옳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이 오면 그들 또한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다 그르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의심이 생기고 믿읍지가 않습니다.
이 존경 받을 수행자들 중에서 누가 진짜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 라고 하시며 아래와 같은 열 가지 식별기준을 말씀하셨다.
① mā anussavena[3] : 자주 들은 것이라 해서 스스로 알아 보지도 않고 버리거나, 취하지 말라. ② mā paramparāya[4] : 전통이라고 해서 스스로 알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버리지 말라. ③ mā itikirāya [5]: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남들이 이야기 하는 것, 확인되지 않은 것), 소문이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가르침을 알아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버리지도 말라. ④ mā piṭakasampadānena [6]: 성전에 쓰여졌다고 스스로 알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버리지 말고, 취하지 말라. ⑤ mā takkahetu[7] : 논리적이라 해서(논리라는 이유로)자세하게 스스로 알아보지도 않고 버리지 말라. 스스로 알아보고 취해라. ⑥ mā nayahetu : 추론(지레 짐작)에 근거해서 스스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버리거나 선택, 취득하지 말라. ⑦ mā ākāraparivitakkena : 형식적인(그럴듯한 사고에 의해서) 사고체계나 체계적인 사유체계에 의해서 스스로 알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버리지 말라. ⑧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 자기의 견해와 생각이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스스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 ⑨ mā bhavyarūpataya :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형태라 해서 스스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 ⑩ mā samaṇo no garūti : 사문은 우리들의 스승이라고 해서 스스로 알아보지도 않고 받아들이거나 버리지 말라. 3. “만약 그대들 스스로가 이 가르침들이 좋지 못하고 허물을 가지고 있고 이 dhamma(법)들은 지자들에 의해서 비난 받으며 이 dhamma들을 거머쥔다면 괴로움으로 이끈다.
이렇게 알 때 그대들은 이 dhamma를 버려야 하리!” 이 가르침들이 옳은지 그른지 선이냐 불선이냐 또는 다른 사람들이나 지혜로운 자들이 받아들일 것인지, 행복으로 이끄냐, 불행으로 이끄냐, 실생활에 이롭냐, 아니면 해로운가는 lobha(탐욕), dosa(성냄), moha(어리석음)를 기준으로 판별한다.
그 사람이 욕심이 있고 욕심으로 완전히 휩싸였을 때, 그 사람이 욕심으로 꽉 차있을 때 그 때에 그 사람은 5계[8]를 파괴한다.
dosa 그 자체도 나쁘지만 dosa는 5계를 파괴한다.
5계가 파괴되면 dukkha(苦, 괴로움)로 이끈다.
( 5계에는 술이 빠졌다.
) 깔라마 경에서는 십 선법[9]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십선법에도 술은 나오지 않고 ‘말’에 대해서 자세히 나온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술은 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sutta(경)에 의한 sutta의 해석을 해본다.
십 선법에도 일반 생활법에는 술이 빠졌다.
붓다는 술을 의도적으로 뺀 것같다.
‘깔라마인들이 술을 좋아하니까 술 없이 이야기가 안될 것 같으니까’ 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lobha, dosa, moha가 안 좋다고 하는 것은 5계를 파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lobha, dosa, moha를 스스로 보아야 한다.
스스로 보기 힘들다면 행위를 바라. 파괴하는 그 곳에서 lobha. dosa. moha를 볼 수 있다.
가르침 중에 lobha. dosa. moha를 줄이지 못하는 가르침이라면 선택하지 말라. lobha. dosa. moha를 버리게 해서 청정하게 계를 지키게 함으로 그대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선택해라. 스스로가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들을 이익 되게 하고 행복으로 이끈다.
깔라마들이여, 그것을 가까이 해서 살아가야 하리. 그래서 lobha. dosa. moha를 갖게 되면 다른 여인에게 가지 않고, 취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오래 동안 이로움과 행복이 있다.
dosa가 없고 moha가 없어도 또한 그렇다.
4.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가,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것을 버려야 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이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 답은 5계이며, 5계를 지키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lobha. dosa. moha이다.
lobha. dosa. moha를 없애게 해주는 그러한 가르침을 선택해서 lobha. dosa. moha를 버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lobha. dosa. moha를 어느 정도 버린 사람은 4무량심을 갖게 되는 사람이라 말한다.
lobha. dosa. moha가 없고 4무량심을 갖게 된 사람은 4가지 안심(4가지 위안)을 갖게 된다.
5. 이 경전에서 붓다는 내생이 꼭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①내생이 없다면 지금 이 생에서 5계를 지키고 4무량심을 가짐으로써 함께 행복하지 않느냐. ②내생이 있다면 너는 분명하게 이런 좋은 5계를 지켰고 또 서로가 함께 잘 지냈기 때문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
미래를 부정한다면 현재에 5계를 지켰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붓다는 내세를 강요하지 않았고 강요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화를 시키고 있다.
③나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으니 스스로의 심리적 안심을 가지라는 것 착한 일만 하고 두려워 하지 말고 안심을 가져라. ④내가 남에게 시키지도 않았으니 서로 함께 좋을 것이다.
라고 마지막으로 안심과 확신을 시켜준다.
법문을 듣고 깔라마들이 붓다의 강력한 재가 제자가 된다.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한 것이 아쇼카 대왕 때 까지 내려 왔고 기념비로 탑을 세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DN. Ⅱ.45.29, D.Ⅱ.103, D.Ⅱ.120, 37조도품 등에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수행을 하며, 수행은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의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설하고 있다.
6. 우리들이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lobha. dosa. moha를 제거하는 방법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제대로 설해놓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초기불교는 위대하고 그 선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것은 행(行)으로 옮겨지고 행으로 옮겨진 것은 다시 나와 남의 이로움과 행복과 직결된다고 하는 것, 그래서 초기불교, 즉 붓다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옳고, 나와 남을 위하는 것이라 결론 지을 수 있다.
붓다는 논리나 이론의 완전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즉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것은 lobha. dosa. moha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야 되고 말로만 lobha. dosa. moha거나 심리적으로 lobha. dosa. moha가 아니라 행으로, 오계로써 나타나야 된다.
그래야 나와 남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매우 짜임새 있는 법문을 하셨다.
그리고 그 사이에 4무량심을 말씀하셨다.
탐욕.화냄. 어리석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자비로운 마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씀하셨다.
끝 [1] 붓다가 깨닫기 전 알라라칼라마에게서 삼마타 수행을 할 때 같이 수행했던 도반 [2] 바란두-sutta(A.I.276) 전통방식 표기법(바라두까 깔라마 : A.3:124) [3] anussava : m.[anu-sava]①소문. 풍설.②전통. -ena : In. sg. ~으로 인해서, ~때문에. [4] paramparā : f.[paraṃ-para]①혈통. 가계.②연속.//그 다음. 전전 상승. 전통 [5] itikīrā : ‘이렇게 들여진 것’. 이야기. 전설. 억설. kirā. kila : ind. 전하는 말로는. ~라는 이야기다.
[6] piṭakasampadāya : 삼장의 전승. 전통에 따라. 삼장의 권위에 근거해서. [7] takkahetu : 의심 또는 추론의 근거, 추론에 따라서. takka :m. ①사고. 사유. ②추론. 논리. ③조사④의심. ⑤철학적 체계.// -tu : sg.ac. 어떤 이유로(adv.) [8] ①pāṇaṃ pi hanti ②adinnam pi ādiyati ③paradāram pi gacchati ④musā pi bhaṇati [9] ①살생 ②도둑질 ③사음 ④망어 ⑤기어 ⑥양설 ⑦악구 ⑧탐애 ⑨진애 ⑩치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