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절만 하면 되나요

법륜스님

즉문즉설 – 절만 하면 되나요? ▒ 문 불교엔 수행법이 참으로 다양한데 어떤 스님은 염불이 최고다, 어떤 스님은 참선이 최고다, 어떤 스님은 주력이 최고다..

또 어떤 스님은 사경만 하면 목적 달성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이 부족한 입장에선 혼동이 됩니다.

▒ 답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보고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동쪽으로 가세요’ 그랬어요.

그걸 시자가 듣고 ‘아 서울은 동쪽으로 가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사람이 와서 물었습니다.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부처님께선 ‘서쪽으로 가세요’ 그랬어요.

그래서 시자는 알았어요.

‘아 서울 가는 길이 동쪽만 있는 게 아니라 서쪽도 있구나’ 다음 사람이 와서 또 물었습니다.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시자가 헷갈렸습니다.

‘동쪽인가? 서쪽인가?’ 그런데 부처님은 ‘북쪽으로 가라’ 이러십니다.

그래서 시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또 있네..

동쪽도 있고 서쪽도 있고 북쪽도 있으니 이번엔 남쪽이겠구나’ 그런데 다음 사람이 와서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물으니 부처님께서 ‘동쪽으로 가라’ 이러십니다.

시자는 또 틀렸어..

‘아 불법은 너무 어렵다.

왜 이렇게 복잡하나?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하나로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은 인천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춘천사람 세 번째는 수원사람이고, 네 번째는 부천사람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동쪽이면 동쪽..

어느 하나로 말해야 하겠어요? 아니면 인연을 따라야 하겠어요? 인연을 따라 방향이 다르겠죠? 그러니까 지금 거사님은 무유정법을 몰라서..

금강경의 핵심은 무유정법(無有定法)이죠? 정함이 있음이 없다..이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서울은 아무데로나 가도 됩니까? 아닙니다.

그럼 서울 가는 길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공(空)의 도리입니다.

한 길만 있는지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

이걸 반야심경에선 색즉시공이라 하고 그래서 정해진 길이 없나 했더니 그것도 아냐..

인연을 따라 길은 분명히 있어..

이걸 공즉시색이라고 합니다.

이걸 금강경에선 ‘무유정법’이라 하고, 법성게에선 ‘불수자성 수연성’ 이라..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定)한 법의 경지에서 바라보니까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생각하는 겁니다.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운동 부족입니다, 운동 좀 하세요’ 그래서 ‘무슨 운동을 할까요?’ 축구선수한테 물었더니 ‘축구하세요’ 그래..

농구선수한테 물었더니 농구하라 그래..

조깅하는 사람한테 물었더니 조깅하라 그래..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게..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거니까..

스님이 어떤 걸 긍정한다 해서 그것만 있는 게 아니고 어떤 걸 부정한다 해서 그게 틀린 것만도 아닙니다.

(그럼 어떤 걸 하나 맞는 걸로 일념으로 정진하라 이 말씀이신가요?) 일념(一念)으로 정진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또 그렇게 정진할 때 어떤 스님한테 물어보면, 그게 아니라고 그러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니라고 그럴 때 깨쳐야 돼요.

여러분은 자꾸 남의 말을 따르잖아요? ‘이거다’ 그러면 그 길로 가다가..

‘아니다’ 그러면 또 헷갈리고..

그러나 그렇다고 하거나 아니라고 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되면 아무 문제 없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국수를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 보고도 오로지 국수만 먹어라 이것도 안 되지만 내가 국수가 좋다고 맨날 국수만 먹겠다..

이것도 안 되죠.

밥을 먹을 때도 있고, 라면를 먹을 때도 있고, 이것 저것 섞어 먹을 때도 있고 그렇지..

고개가 뻣뻣한 사람 보고는 ‘절을 하세요’ 그러죠? 그런데 또 절만 하면 되는 줄 알면 뭐라고 그래요? ‘절만 한다고 되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절 하기 싫은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아 절할 필요 없겠다’ 또 요렇게 갑니다.

그래서 언제나 상(相)을 깨뜨리는 게 법(法)입니다.

상(相)이 상(相) 아님을 아는 거지, 거기에 또 다른 상(相)을 세우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만상(萬相)은 일상(一相)으로..

그 일상은 또 뭡니까? 하나의 상(相)을 세우면 이미 두 개가 돼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금강경에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이 있습니다.

하나의 상(相)이란 상(相)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같이 세우고 없어짐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대화할 때도..

따뜻하고 냉정함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여러분은 ‘따뜻해야 합니까? 냉정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어린 아이에겐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고, 사춘기 애들한텐 냉정한 사랑이 필요하다..

끊을 땐 끊는 게 필요하고 포용할 땐 포용하는 게 필요한데, 이걸 정해 놓을 수가 없어요.

배아파 찾아와도..

못 먹어 배아픈 사람이면 ‘밥 줘라’ 이렇게 얘기하고 너무 먹어서 배 아프면 ‘하루 굶어라’ 이렇게 말하는 거지 굶어라, 먹어라..

이렇게 정해 놓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도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이런 도리가 돼야 중도(中道)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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