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법상스님-

시린 새벽, 예불을 올리고 좌선을 합니다.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매일 새벽 이렇게 이 작은 도량에서는 새벽 시간에 잠시 앉아 이렇게 ‘그저 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바라거나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순간 이 모습 그대로 이렇게 존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지요.

그 순간 우리 모두는 그저 그렇게 법당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분별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고, 승속도 없으며, 남녀의 차별이며, 나이의 차이도 없이, 그 어떤 나뉘는 것 없이 그저 그렇게 잠시 앉아서 존재하고 있음이랄까, 이 순간의 현존을 다만 느낄 뿐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무런 차별도, 그 어떤 언어나 개념적 분별도 없이 그저 그렇게 할 일 없는 무위의 시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데는 다른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앉아있을 뿐이지요.

‘누가’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에’ ‘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있는 그 순간 그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닐 ‘나’ 조차도 하나의 분별일 뿐이지요.

그렇게 있는 순간 우리는 스님도 아니고, 주부도 아니며,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어려운 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아니고, 바쁜 하루 일과로 조바심치는 나도 아니고,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앉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어요.

이런 순간을 애써 ‘선’이나, ‘좌선’이나, ‘수행’이라고 이름 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름 짓고 개념 짓는 것이 바로 분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앉아 있는 데에는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새벽 시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라는 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공부를 마음공부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이 공부는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문제입니다.

앉아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의 모든 일상의 문제입니다.

앉아서 평화로울 때처럼 움직임 속에서, 무수한 일의 스트레스 속에서, 번잡한 출근길의 정신없음 속에서, 사람들과의 부딛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한 존재감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몸이라고 이름 붙여 온 어떤 것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감정이나 욕구나 의식이라고 불리우는 정신적인 현상을 생생하게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는 참선이며 좌선이며, 위빠사나며 수행이며 하는 말도 번거로운 개념일 뿐이지요.

이것은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고, 명상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명상이나 수행이라는 등의 다양하게 이름 붙여 놓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힘을 주어서 관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무위의 시간을 하릴 없이 보낼 뿐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무수히 해 왔던 모든 행위와 판단분별과 망상과 태도, 견해들을 그저 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었던 무언가를 새롭게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무언가를 얻고자, 되고자 해 오던 모든 노력과 애씀들을 그저 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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