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집

결 집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결집[結集, Samgiti]   결집이란? 1) 결집의 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노래(합송)하고, 법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우는 것(集法)을 말한다.

2) 결집의 정신은 正法具現(Council)과 正法久住다.

3. 결집의 정의는 불교 교단 내에서 공식적 회합을 통해 전해 들었던 불설을 만장일치로 승인, 합법적인 正典化 절차나 형식을 말한다.

부처님 재세시의 결집      부처님이 본인 사후 “나의 교법이 오래 머물고 상가가 굳건히 지켜지기 위해 나의 가르침을 함께 합송(Sam gīti)하라”고 함으로 사리뿟따가 비구대중을 모아놓고 부처님 가르침이 이러 이러하다(디까니까야 마지막 두 번째 Samgīti-sutta)고 함께 합송하였으며 합송이 끝나자 부처님이 동의(인가, Samanuññā)하였다.

이것이 1차 결집으로 볼 수 있으며 결집의 정신이 완벽하게 담겨있다.

상가띠 결집은 승가의 존속을 위해서 수행을 강조, 즉 37조도품을 합송한 것이다.

  결집 1. 1차결집(Pāli 율장에 기록) 부처님 사후 늙은 수바드라 비구는, 그들을 감시하면서 몹시 귀찮게 굴었던 붓다가 사망한 것을 공공연하게 기뻐하면서, 비구들은 모든 통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이제부터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살 것을 제의하였다.

까사빠비구가 이말을 듣고 승단의 무질서와 부처님 법의 훼손을 걱정하여 비구들에게 法(dhamma), 律(vinaya)을 결집할 것을 제의했다.

부처님 입멸 100일 후 라자그리하(raja, 왕사성) 칠엽굴(satta panni guhā)에서 마하까싸빠 비구가 비구500명과 함께 법(아난다)과 율(우팔리)을 합동 토의를 거친 뒤 공동으로 합송. 붓다 사후 비구들이 아난다 비구에게 다섯 가지 사항[1]을 질책하지만 그는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승단의 화합을 위하여 참회 한다 라고 하였고, 찬나 비구는 브라마 단나(왕따)시켰다.

1차 결집은 법을 세우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그 의미는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고 담마를 구심점으로 하였으며, 붓다 사후 자이나교도들 처럼 파란이 없었다는 점이다.

2. 2차 결집 부처님 입멸 100년 후 깔리 아쇼카(Kāl āsoka)왕 치세 때 외살리(vesali)에서 야사비구가 외살리 비구들이 신도들로부터 금.은화를 받는 것을 보고 사리붓따의 막냇동생으로 추증되는 ‘레오따’비구를 포섭하여 비구 700명을 소집, 레오따 비구가 죽비를 잡고 8개월동안 외살리 비구들의 계율변경(십사[2])를 논의 하였으나 십사가 비법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외살리 비구들은 판정에 불만을 품고 따로 일만 명이 모여 결집을 하였고 이를 근본분열이라 하며, 상좌부(Teravāda)와 대중부(Mahā saṅghika)로 분열하였다.

2차 결집은 율의 문제로, 다시 한번 ‘법’에 대하여 합송하고 ‘율’에 대해서 다시 확인하였다.

3. 3차 결집 1.2차 결집은 율장에 나와 있지만 3차 결집은 율장에 나와 있지 않다.

  기원전 250년 아소카왕 시절 빠딸리 붓다에서 목깔리 뿟다띠사 비구가 아소카왕의 요청을 받아 승단에 자격미달과 비법을 행하는 승려[3]들이 많아 이를 축출하기 위하여 Kathā vatthu(논점. 논서)을저술, 200점의 논점을 작성하여 승려와 비승려를 가렸다.

   질문으로 Kiṃ vādi ssb (무엇을 말하는 사람. 완전히 깨달은 스승께서는)라 했을 때 Vibhajjavādi(분별설)라고 답하면 승려, 답하지 못하면 비 승려로 판명하여 승단에서 축출하였으며, 그때 6만명을 외도로 판정하여 축출하였다고 한다.

    3차 결집은 교단내의 정화작업이었으며 왕의 원력에 힘입어 목깔리 붓다 띠사[4]비구는 승단에서 비 승려를 축출하기 위하여 논서를 저술하였고, 이렇게 해서 상좌부 불교는 빨리 삼장을 갖추게 되었다.

4. 4차 결집 : 12C경 스리랑카에서 결집 5. 5차 결집 : 19C 중반(1868년) 버마에서 4년간 석경결집(돌에 새김) 6. 6차 결집 : 1954년 버마에서 3년간 결집, ‘차다상가야’인도로 건너가 데와나가리로 번역됨 ‘날란다 본’   결집의 결론     교단 분열에 관한 불교의 전승들은 유동적이고 모순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객관적인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전승들은 초기 교단의 정신과 경향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심리학적 자료가 된다.

  붓다 사후 제자들은 스승이 그들에게 문서로 된 어떠한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급하게 교리적인 관점과 계율적인 관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계율에서는 바라제목차의 계조(戒條)들은 잘 제정되었지만 소소계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그러나 상가는 이미 발표된 계율을 합법적으로 고칠 수 있는 어떠한 권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까샤빠 비구 주위에는 모든 능력을 갖춘 아라한들이 있었지만 동료들 전체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뿌라나와 우빠다나 비구 등은 자신들이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대로 가르침을 간직하기로 했다.

특히 아라한이 되지 못한 범부승들의 반대가 심했다.

정신적으로 낮은 단계의 비구들과 초기 교리에 의해 열반에 직접 도달할 가능성을 부정당한 재가신도들 간에 공모가 있었을 것이다.

  불교가 시작된 뒤 첫 200년 동안, 질투로 인해 생긴 보이지 않은 적대감이, 한 편으로 아라한들과 한편으로 범부승들 및 재가신도들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 적대감은 끊임없이 더욱 심한 갈등을 일으키다가 끝내 교단분열에 이르고 말았다.

  최초의 논쟁은 앞에 살펴보았듯이 계율에 관해서다.

진보적 성향의 젊은 비구들은 붓다가 계율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소소계를 폐지 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아라한들은 가장 사소한 계율까지도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뒷날 외살리 비구들, 즉 브리지뿌뜨라까들은 그들이 익숙해 있었던 관용적인 실천들, 특히 수행자들이 현금 보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율장에 포함시키려고 했고, 그러나 그들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아라한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질책을 받을 만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과 논쟁하지 않고, 그들의 명예와 특권에다 직접 타격을 주려고 이단적인 5사를 출현 시켰다.

5사: 아라한도 유정을 할 수 있다 ➁ 아라한도 아직 무지가 있다.

➂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이 있다 ➃ 아라한도 남으로 하여금 깨달아 들어가는 타력이 있을 수 있다.

➄ ‘도’는 들음에 의해서 생겨 날 수 있다.

[1]  소소계 내용을 왜 물어보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가사를 밟은 것. 여성들이 부처님 마지막 조문을 할 때 눈물이 붓다의 유체에 떨어진 것. 붓다를 몇 겁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 여성출가를 붓다에게 간청한 것. [2] 1. 뿔에 소금을 축적할 수 있다.

2. 정오가 지난 뒤에도 손가락 두 마디가 넘기 전까지는 공양을 할 수 있다.

3. 한번 탁발하여 식사를 한 후에도 또다시 다른 마을에서 새 음식을 탁발 할 수 있다.

4. 동일한 구역에서 따로 포살을 할 수 있다.

5. 교단 문제를 결정할 때 참석치 않은 비구의 동의를 예상해서 먼저 결정한 후 나중에 온 비구에게 사후 승낙을 구할 수 있다.

6. 붓다나 아사리의 행동을 따라 할 수 있다.

7. 식사 후에 우유 석밀을 다시 우유에 타서 마실 수 있다.

8아직 술이 안 된 발효한 야자즙을 마실 수 있다.

9. 테두리가 없는 헝겁을 방석으로 사용 할 수 있다.

10. 금.은을 보시 받을 수 있다.

[3] 아소카왕이 승단에 물지적 경제적 지원을 잘 해주니까 어중이 떠중이들이 승단에 많이 들어와서 승단 내에서 재 의식, 동물의 희생 등을 행하는 것을 보고 불교정화를 꿈꾸게 됨 [4]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띠사의 스승 10세 때 스승에게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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