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수행자와 비수행자의 차이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차이

-법상스님-

한 세상 흘러 흘러 살아가다문득 고개돌려 내면을 관찰하는 수행자…혹은 이따금이라도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본 일상인들은한번쯤 내면의 이중성에소스라치도록 놀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이 세상 누구라도문득 문득 경계에 따라극히 이기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자신에 대해’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나는 선하고 성격도 좋고…’등등 스스로를 고정관념화 시켜 둔 이에게서이런 ‘이기적인’ ‘악한’ 마음의 관찰은자신에 대한 커다란 실망을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그런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이중인격자라 자신을 비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우린 전생, 또 그 전생…수없이 많은 선업을 지어왔고, 악업을 지어왔습니다.

그렇기에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내면 깊은 곳에 악한 업장은 자리하게 마련입니다.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내면 깊은 곳에 선한 업장은 자리하게 마련입니다.

선악의 경계가 닥쳤을 때마음 속에서 그에 합당한 쾌, 불쾌의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이는 더 이상 중생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선악의 마음이 경계에 따라 올라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면에서 올라오는 악한 마음,이기적인 마음에 얽매여서 괴로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마음은 누구나 당연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인연따라 당연히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차이는마음 속에서 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의 차이가 아니라올라오는 그 마음에 머무느냐 머물지 않느냐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에 머물러 또 다른 분별심을 일으키느냐일으키지 않느냐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한 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화를 반복하기에그러한 세상과 함께 한마음으로 돌아가는우리의 마음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그 변화의 흐름이 ‘선한 마음’이며또 다른 한 흐름이 ‘악한 마음’ 일 뿐입니다.사실은 선악, 이타, 이기적인 마음이란 것 또한분별심이기도 합니다.

대지에 불어오는 바람이나 대지를 적셔주는 비에 대고’선하다’ 혹은 ‘악하다’ 할 수 없듯이우리의 마음 또한 그저 분별없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다만 그 비, 바람이 극단으로 내몰아칠 때 병통이듯우리 마음 또한 극단으로 분별을 일으킬 때선악, 이타와 이기가 생기는 것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그 올라오는 악심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분별심 없이 관찰합니다.관찰하는 마음(객관)은 관찰되어지는 마음(주관)을맑게 정화시켜 줄 것입니다.

올라오는 악심은 ‘내 마음’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주관적 분별 망심입니다.이를 관찰하는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며 ‘나다’라고 하는 아상이 접목되지 않는무분별의 객관적 청정심입니다.

내면의 힘인 관찰하는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며외부 경계에 따라 올라오는 마음은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관찰되어지는 마음을맑게 정화하여 줄 것입니다.

내면의 밝으신 부처님 마음이경계에 휘둘리는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맑게 정화하여 줄 것입니다.그렇게…그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됩니다.그가 바로 수행자입니다.이기적인 마음, 악한 마음이 일어날 때라도당황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그 다음은 내면의 ‘한마음 참생명’에서 밝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관’하는 마음이 바로 방하착의 마음(놓는 마음)이며이 마음 부처님께 올리는 마음 공양이기에그 해답은 내면에서 자연스레 나오게 될 것입니다.’이중인격자’ 아닌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렇지만 철저히 ‘이중인격자’인 사람또한 없습니다.

‘나는 이중인격자’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이미 내 마음 가운데서 일어나는’선’ 과 ‘악’의 모든 마음을 관찰한 사람입니다.이미 수행자의 길에 들어 선 사람입니다.

그런 생활 속 수행자의 걸음 걸음에이 글이 고요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황혜음_문수보살_오자진언.wma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