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불교라네
-법륜스님-
오래전의 일입니다.
미국여행 중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어떤 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스님 한 분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지금 주인장은 출타중이고 나도 객승이라네.” 그러면서 노스님은 당신이 하루라도 먼저 왔으니 나를 대접하겠다며 손수 비빔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녁 공양을 잘 얻어먹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한국 불교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한국불교가 잘못된 책임이 그 노스님에게 있다는 듯이 격앙된 목소리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스님들은 뭐하고 있는거냐.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다.
이것도 고쳐야 하고 저것도 고쳐야 한다….
그렇게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듣고만 있던 노스님이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이라네.
이것이 불교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스님이고, 마음이 깨끗한 자가 머무는 곳이 법당이고, 그것이 불교라는 그 한마디가 저의 만 가지 분별을 끝내버렸습니다.
저는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이 스님인 줄 알고, 불상을 모신 기와집이 법당인 줄 알고, 그런 게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 생각하고 그것을 뜯어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허공의 헛꽃을 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없는 꽃을 아무리 꺾으려 한들 결코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 생각하고 고치려 들었으니 죽을 때가지 애써 봐야 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노스님의 한마디로 그 어리석음이 탁 깨져버렸습니다.
그분이 바로 서암 큰스님입니다.
내 입장을 버리고 실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상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윤리 도덕적인 고정관념의 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것은 괴로움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상을 깨고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생기든지 미워하거나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가 내 마음을 오해해서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세상 누구하고도 원수 질 일이 없고 미워할 일이 없습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대목이 바로 이를 뜻합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