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순간, 죽는 순간 – 법상 스님 –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중요하지만 그렇더라도 죽기 직전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한 평생을 맑게 선업을 지으며 살아왔더라도 죽는 순간 마음이 삿된 쪽으로 크게 휘둘리면 그 어두운 마음이 순간 업식을 덮어버려 생각지 못하던 쪽으로 윤회의 길을 가야 하기도 한답니다.
이를테면 죽는 순간 누군가에게 살생을 당하면 그 마음 여여하지 못하고 한이 쌓이게 되기 때문에 나를 죽인 그 사람에 대한 원한심으로 인해 그 사람 주위에 윤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러한 인과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요꼬하마 팔왕사 밑 어느 촌에서 명주실을 팔아 생계를 잇는 한 상인이, 장에 가서 실을 팔아 돈을 쥐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밤이 되어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 도박으로 돈을 잃은 도박꾼과 함께 투숙케 되어,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상인이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도박꾼이 그 다음날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이 상인을 죽이고 돈을 강탈해 도망갔다.
그 후, 어느 때에 이 도박꾼의 아내가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았는데, 어깨에 붉은 띠처럼 생긴 핏줄기가 기다랗게 줄지어 있어, 남편은, 자신이 죽인 상인의 상처자국과 같음을 알고, 그 상인이 아기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 후로 자식만 보면 공포심이 일어나서, 결국 두 손가락으로 아기 코를 꼭 쥐어서 질식사시켰다.
이듬해에도 아이를 낳았는데, 코가 홀쭉하고, 어깨에 핏자국이 있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이번에는 죽이지 못하고 길렀다.
상인이 죽은 지 7년째 되는 날, 술 취해 집에 오니 아이가 자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자다가 아이가 소변보러 가다 남폿불을 덮쳐 아버지의 몸에 끼얹어 결국 아버지는 죽고 말았다.
이날이 상인의 제삿날이었다.
이와 같이 죽는 한 순간 나를 죽인 이에 대한 원한심으로 인해 그 동안 살아오며 지어온 윤회의 길을 잠시 등지고 죽는 한 생각 휘둘린 마음으로 인해 윤회를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윤회를 하여도 제 업은 그대로 가지고 나겠지만 죽는 한 생각이 한 생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들을 죽이는 사람이 그 짐승의 눈을 보고 죽이지 말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나를 죽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마음속에 품고 죽게 되면 아무리 짐승이라도 죽는 한순간 그 사람에 대한 증오한 마음으로 인해 죽인 이와 닮은꼴인 인간으로 나고, 그 이에 대한 원한심으로 인해 그 이와 인연관계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꼭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원한심을 가지고 죽고 죽이게 되었던가, 어떤 사람에 대한 지독한 집착을 가지고 죽었던가, 죽는 순간 복잡하고 암울한 마음 상태에 있었다던가, 그렇듯 죽기 직전의 마음이 그 어떤 경계에 크게 휘둘리게 되었을 때 원만하게 삶을 정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늘상 죽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죽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은 인생의 어느 순간 죽음이 덮치더라도,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 될지라도 훌훌 털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생에 대한 집착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지금 이 순간 죽음이 온다면 평온하게 맞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우린 연습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죽는 연습이라기보다는 일체의 집착을 끊는 연습입니다.
방하착의 연습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집착이 큰 사람일수록 죽는 순간 그 집착을 놓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죽는 순간 집착을 놓지 못하면 그 착심으로 인해 집착하는 대상에 달라붙어 옴짝달싹을 못하게 됩니다.
가야 할 길을 따라가질 못하고 이 생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한 집착이란 막연한 삶에 대한, 생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현재 누리고 있는 명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거나, 돈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람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어떠하든 간에 집착이 큰 사람일수록 집착하는 대상에 머물러 있는 마음, 딱 달라붙어 있는 마음이 크게 마련입니다.
딱 달라붙어 있으니 자유롭지 못하고, 가야할 때 가질 못하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져오던 일체의 모든 집착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몸뚱이도 놓아야 하고, 부모 형제에서 사랑하는 사람까지 다 놓고 가야 하거늘, 까짓 돈, 명예, 권력, 지위, 명성, 학식 등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잠깐, 아주 잠깐 인연 따라 나에게로 들른 것일 뿐이지 고정되게 ‘내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 다 버려야 합니다.
생을 살면서도 순간 순간 버리고 살아야 하고, 그 생의 마지막 길에서는 더더욱 어느 하나 잡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순간에 한 생각 크게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가며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란 죽음 앞에서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 어떤 괴로움을 죽음 앞에서 괴로움이라 이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사랑도 그로 인해 오는 온갖 괴로움도 더 이상 괴로움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에 대한 집착을 놓고 사는 사람은 살면서 항상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괴로움도 생에 대한 집착까지를 놓고 사는 사람 앞에선 그리 큰 괴로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라면 돈 없다고 괴롭울 일 없을 터이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살아가며 일어나는 자잘한 괴로움 등에 얽매이는 일이 많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일체의 집착을 놓고 사는 사람이 자유인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죽음이 우리를 덮칠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우린 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죽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 갈 날은 살수록 줄어들고, 죽는 날은 살수록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아 갈 궁리를 하고 살지만, 수행자는 죽어 갈 궁리를 해야 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궁리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순간에만 행복한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자유로운 궁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음’에서 오는 일체의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사는 일입니다.
생에 대한 집착까지를 다 놓아버리고 살아야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에 한 생각 턱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다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웅다웅하지 않고 여여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이유를 ‘죽는 순간 잘 죽기 위해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어두운 끝이 아니라 또다른 밝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어 낡고 늙다 보니 보다 새로운 몸뚱이를 받으려는 작은 변화일 뿐입니다.
노쇠한 몸뚱이를 건강하고 젊은 새 몸뚱이로 바꾸는 것입니다.
노쇠하니 수행하기도 어렵고 살아가기도 어려우니 보다 젊고 건강한 몸 받아 좀 더 밝게 수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어떤 ‘괴로움’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괴로움의 흔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변화는 작지만 매우 새롭고 흥겨우며 설레는 변화입니다.
이렇게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어두움으로의 변화가 아닌.
새로움, 밝음으로의 활기찬 변화라는 것입니다.
다만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죽는 순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번 한 평생 살며 지어 온 신·구·의 삼업의 과보로 다음에 받을 몸뚱이가 그에 대한 특성이며, 각종의 업식들을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시 이래로 지어 온 수많은 선악의 업식들이 온전히 100% 몸뚱이에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다음 생 받을 몸뚱이는 영향력이 큰 업식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독심이 큰 사람이라면 독사의 몸뚱이로 날 수도 있을 것이며, 수행 열심히 한 수행자라면 스님 될 인연으로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이 베푼 사람은 부잣집에 날 것이고, 성내고 화내며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수라에 나거나 사람으로 나더라도 폭력배의 자녀로 날 수도 있을 노릇입니다.
그와 같이 다음 생을 결정짓는 순간이기 때문에 죽는 순간이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순간 정신 똑바로 깨어있지 못하거나, 지난 생에 대한 집착으로 마음이 머물러 있다면 바로 다음 생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업식이 선하며 맑고 밝은 사람이라도 죽는 순간 밝게 깨어있지 못하고 원한심이나 집착심으로 휘둘린다면 자칫 무시 이래로 가지고 온 악업들의 과보를 받아 다음 생에 어찌 태어나게 될지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기왕지사 태어날 것이라면 수행할 수 있고 업식 닦아낼 수 있는 사람 몸 받아야 할 것이고, 수행하여 무시 이래로 지어 온 온갖 업식들을 닦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죽는 순간이 중요합니다.
다음 한 생을 선택하는 순간이기에 그러합니다.
다음 생에 밝은 수행자 몸 만나 성불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수행하는 이유가 ‘잘 죽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는 것이 순간 순간 놓고 갈 수 있는 것이 ‘잘 죽는’ 연습하는 일입니다.
순간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에 충실하지 못하면 앞으로 다가올 죽음의 ‘순간’에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순간 순간 깨어있음이 모여 그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순간 밝게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 깨어있고, 순간 순간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대로 죽음의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