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실천/회향하는 법 – 보시]
-법상스님-
이 세상에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진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실천해 봐야 그것이 아상을 늘리는 일 밖에 되지 못하고, 이번 생 조금 편히 살아보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지만, 이 두 가지의 실천은 온전하고도 진리와 합일하는, 다음 생에까지 영원히 이어지는 온전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수행과 보시…
지혜와 복…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마음공부와 복짓기…
말이 두 가지지 이것은 그 근원이 한 줄기에서 나옵니다.
수행이 되어야 베풀 수 있고, 마음을 비워져야 ‘내 것’이라는 소유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수 있어요.
마음공부를 하면 할수록 집착이 놓여지며,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베푸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너무 베푸는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좀 단적으로 말해서 베푸는 것이 얼마나 아깝지 않을 수 있고, 베풀면서 상을 내지 않을 수 있고, 얼마만큼 베푸는 삶을 사느냐의 여부가 그 사람의 수행 됨됨이를 가늠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수행과 실천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의 공덕을 바라면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베풂의 실천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조금 방편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수행의 공덕 그 이상으로 베풂의 공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수행의 공덕보다 베풂의 공덕이 더 직접적이고 빠를 수 있는 것이지요.
도반 스님께서 말씀하시데요.
당신은 오히려 돈이 없고 살기가 어려울 때는 있는 것 탁탁 다 털어서라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큰 절 본사 들어가서 강원 스님들 대중공양 해 주고, 어떻게 해서든 베푼다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면 그냥 주머니가 쪽 빠지고 가난해 져야 하는데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주머니를 넉넉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래요.
물론 베풀면 이렇게 다 들어오니까 베풀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베푼다는 것 처럼, 보시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천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하고, 또 못합니다.
좀 베풀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생각은 항상 있는데 그게 여간해서 잘 실천이 되질 않는단 말입니다.
막상 하려고 하면 아깝고 주저하게 되고 이놈의 욕심 덩어리가 그냥 실천하려는 발목을 잡는단 말이예요.
그게 바로 우리 업이고 욕망의 모습입니다.
베풀 때는 절대 분별이나 계산이 있어선 안됩니다.
그냥 베풀 때는 그냥 턱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베풀고 나면 난 어떻게 살지?’ ‘이것마저 주고 나면 좀 어렵게 살아야 할텐데?’ 이런 베풀려는 마음을 방해하는 그 어떤 생각이라도 좀 심하게 말해서, 모두 전혀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업이고, 욕망이고, 집착인 겁니다.
아니라고 말하겠지요.
그래도 내가 살 만큼은 있어야지, 너무 무식하게 베풀면 오히려 중도가 아니지, 온갖 정당화시키려는 생각과 교리들이 머릿속을 혼란케 하겠지만 그것은 진리의 실천을 방해할 뿐입니다.
진리는 진리 그대로 온전합니다.
진리의 실천은 나를 살려주지 나를 죽이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스님께서 설법하시는데 그러시데요.
지금 여러분 가진 전 재산을 10원 한 장 남기지 말고 다 이웃을 위해 베풀어 보라고, 그러면 거지가 되어 거리로 내몰릴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다고 거지 절대 안 된다고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베풀어서 거지 된 사람 있으면 스님이 다 먹여살려주고, 책임 져 준다고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씀을 하시더란 말입니다.
베푼다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가든, 철학자든, 성인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재론의 여지가 없는 온전한 진리인 것입니다.
보시하는 것은요 그 몇 배 이상으로 다 들어오게 되 있지 그냥 버리게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참…
이런 말까지 해야 되나요? 이런 말 하면 또 ‘아 베풀면 다시 들어온다 그랬지…
’ 이럴까봐 이런 말 하기 어렵지만 오늘은 방편으로라도 몇 가지 덧붙여야 겠어요.
보시는요 절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법계에 한량없는 이자를 담보로 저축하는 거예요.
설사 ‘내가 보시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들어오겠지?’ 이런 마음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만큼은 분명 되돌아 오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인과응보 이치입니다.
흡사 1만원 빌려주면 1만원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빌려주는 것이 바로 내가 이만큼 주니까 이만큼 똑같이 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분명 그만큼, 아니 이자까지 더 오잖아요.
세상사도 이런데 법계의 일이야 더 말 할거 있겠습니까.
평화로운 마음으로 보시할수록, 베푼다는 상이 없이 보시할수록, 바라는 바 없이 보시할수록 다시 되돌아 오는 것은 한량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금강경에서도 무주상보시를 하면 동서남북 사유 상하 온 우주 법계를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때요? 가난할 수록 오히려 더 베풀어야 합니다.
난 베풀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 때가 베풀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1000원 밖에 없으면 쪼개서 500원이라도 보시해야지요.
수행의 공덕은 느리게 올지 몰라도 보시의 공덕은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만큼 빠릅니다.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이 말은 방편이지 이 말 듣고 보시 공덕을 바라고 보시하면 안 될 일입니다.
다 아는 얘기 했습니다.
그런데 어때요? 다 알지만 다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요.
아마도 내가 베푸는 것이 절대 내 것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부자되는 길이다 하고 굳게 믿는다면 누가 베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무주상보시의 길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온전한 실천의 길이라는 믿음, 보시는 결코 내것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온전한 믿음, 그런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걱정이 되는 겁니다.
베풀면 왠지 모르게 내가 손해보는 거 같고, 나만 더 가난해 질 것 같고, 어쨌든 안 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 중생의 분별심은 도무지 탁 놓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그냥 탁 저지를 수 있어야 내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으며 내 안의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고 기도할 때 꼭 보시와 함께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했을 때 보다 보시를 하고 회향을 할 때 그 때 그 기도의 성취는 더 빨리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100일 기도를 하면서 하루에 1만원씩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 바로 머릿속이 복잡해 질겁니다.
하루 1만원 이러면 까짓거 한번 해 볼까, 하루에 만원 절약하지 뭐 했다가도 머리가 돌아가요.
10일이면 10만원, 100일이면 100만원…
이 즈음되면, 입이 딱 벌어지면서 ‘못한다’ 그럴겁니다.
못하는게 아니라니까요.
어떤 법우님께서 그러시데요.
수행의 공덕이 이렇게 크고 원만한 지 몰랐었는데 정말이지 얼마나 수행하고 기도하는 공덕이 큰지 이제 알겠다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요즘들어 수행의 공덕 뿐 아니라 보시의 공덕, 회향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수행 좀 되었나 안 되었나 궁금하다 싶으면 딱 절실한 곳에 크게 베풀 수 있겠나 생각해 보세요.
참 마음이란 게 신기합니다.
어떨 때는 단 1,000원, 1만원도 커서 못 쓰면서 또 크게 한 번 마음 내면 1백만원, 1천만원도 툭 내던질 수 있는 법입니다.
아니 살다보면 천만원 잊어버릴 때도 있고, 또 남들한테 몇천만원 사기 당할 때도 있고, 또 생각지 못하게 부도가 나서 무너질 때도 있잖아요.
왜 그래요? 그게 내 것이 아니다 보면, 내 업에서 이만큼 소유할 것이 아니다 보면, 또 내 안에 지어놓은 복이 없다 보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다음 순간 내가 어찌될지 말입니다.
그러나 사기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이웃에게 참 좋은 일에 턱 보시를 하고 나면 그 마음도 상쾌하지만 우리 안에 쌓여있는 업도 맑아지고, 또 내 안에 복도 가득해 질 것 아니겠어요.
요즘 세상 내가 쓸 때는 너무 펑펑 아끼지 않고 쓰고, 남에게 베풀 때는 손톱만큼도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안스러워 그럽니다.
그런 소견을 가지고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하고 수행이 어쩌고 운운을 하겠습니까.
이왕에 이렇게 방편으로 이야기 하는 김에 한 가지 더 덧붙여야 겠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죽겠고 그럴 때 우린 다 기도를 하잖아요.
왜 그럽니까? 기도를 해서 기도의 가피를 받으려고, 혹은 기도 수행을 통해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으려고, 다시말해 기도를 할 때는 보통 기도의 공덕을 생각해서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기도의 공덕만 생각하지, 회향의 공덕, 보시의 공덕은 잘 모릅니다.
어렵고 힘들고 역경이 닦쳐올 때 물론 기도하고 수행해야겠지만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큰 공덕이 바로 회향과 보시입니다.
왜 교회 같은데 가면 감사헌금 이런거 많이 내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꼭 교회에 갔다가 내야지 잘하는거고, 절에 갔다 내야지 잘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좋은 일,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헌금을 한단 말입니다.
항상 그 일에 대한 고마움을 널리 회향한단 말입니다.
우리 절에도 그런 신도님 계셨어요.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사중에 대중공양 올리고 또 외박이나 주말이 되면 늘 어려운 이웃 찾아 가고 그러는 분이 계셨지요.
그 분은 그냥 삶 자체가 항상 회향하는 자세가 되어 있으신 겁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려고 하지 않고 베풂으로써 항상 회향을 하려고 하신단 말입니다.
저도 정말 그 분 뵙고 많이 느끼고 배우고 제게 살아있는 법문을 해 주신 분이라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내것으로 고집하고 집착하는게 있겠어요.
그렇다고 그 분이 엄청난 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대중공양 받기가 참 죄송스러울 정도였어요.
그런데도 그 분은 마음이 참 부자셨던 겁니다.
그냥 내 삶의 일부로 만들란 말입니다.
수행과 보시, 복과 지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 두 가지 온전한 진리를 내 삶의 일부로 항상 실천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아니 실천이란 말이 붙을 것도 없이 그냥 내 삶이 되도록 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야 ‘내가 했다’는 상이 붙지 않으니까…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깨달으시고, 아니 그 자체가 되시고, 그대로 함이 없이 실천하시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귀의불 양족존 할 때 ‘양족’이라는 것이 바로 복과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복과 지혜가, 수행력과 복력이 충만하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 두 가지를 실천할 때, 이 두 가지가 내 삶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조금씩 부처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보시를 많이 해야 수행도 그만큼 더 잘 되는 법입니다.
옛 스승님들은 그러셨어요.
가진 것이 많으면 수행은 물 건너 간 것이지만, 가진 것이 적을 수록 수행력은 나날이 쌓여 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많이 쌓아 놓고 있으면 분명 수행과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벌어야 할 때 벌지 않을 수는 없어요.
벌지도 말고, 나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집착 없이 많이 벌어서 집착 없이 항상 회향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선택한 맑은 가난’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내적인 수행도 익어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