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부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지혜

부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지혜

-법상스님-

실제 수많은 민족지 조사 연구 결과 고대사회, 원시사회는 최초의 풍요사회였다.

그들 원시인들은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먹고 남는, 연간 필요소비량 이상의 잉여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발달시켰다.

원시사회는 생계경제가 아니라 풍요의 잉여경제였다.

그것도 잉여를 끔찍한 대규모 전쟁이나 쓰레기로 낭비하는 현대 산업문명과는 달리 잉여를 이웃 공동체와 서로 나누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최적의 생계순환형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농민들, 전세계 대다수 인민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침략 아래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다.

[왜 자립경제인가]박승옥 중에서…

오늘날 TV며 언론 어디에서도 부자되기 열풍을 좀 자제하자는 논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골 골짜기에도 요 몇 년 사이에 땅값이 오른다고 부동산이 몇 배가 많아졌다는 얘기가 있다.

어디를 가든 얼마를 어디에 투자를 하면 몇 년 뒤에는 얼마로 부풀려 진다는 내용의 유혹들이 쏟아진다.

아마도 인류 역사 이래로 요즘처럼 이렇게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밤 늦도록 아니 주말까지 반납해 가면서까지 일, 일, 일에 중독되며 살던 사회가 없지 싶다.

사회는 점점 더 발달되고, 컴퓨터도 날로 발전되며, 일을 도와주는 온갖 기계들도 넘쳐나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시켜주는 운송수단도 날로 발전되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의 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더욱 바빠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하루 일 할 것을 요즘에는 10분도 안 되어 다 끝낼 수 있는 기계가 나왔다면 나머지 하루의 시간 동안 우리는 조금 더 휴식하고 명상하며 여유를 즐겨야 하지 않겠나.

계산으로 따진다면 그게 맞는 말이겠지만, 오히려 요즘의 세상은 사람의 일을 훨씬 빠르게 단축시켜주는 기계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람들은 훨씬 더 바빠지고, 일도 훨씬 더 많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기형적인 경제구조다.

옛날에는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고,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여가활동, 문화생활, 정신적 휴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차도 없고, 기계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는데, 그래서 오직 사람의 힘으로 밭도 갈고, 땅도 파고, 물도 나르고, 씨앗도 뿌리고, 거두고 이 모든 것을 사람의 두 손, 두 발로 다 해야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옛날에는 서너시간 일 함으로써 충분히 자급할 수 있었다는 말이 언뜻 보아서는 억지같고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욕심이 많지도 않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지금처럼 산더미 처럼 쌓여 있지도 않았다.

지금 대도시 괴물같은 도시를 움직이는 수많은 온갖 종류의 직업들이 그 때는 있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고 있지만, 그 소유를 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더 많이 정신을 놓고 살아야 하며, 그야말로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생존을 위한 거의 전쟁과도 같은 수준의 복잡 다단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말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부(富)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 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만큼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부와 비교할 때 나의 부란 기껏해야 아직도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부자가 되면 될 수록 불가피하게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생계 습관을 지니게 되어, 몇몇 필수품과 편리한 생활도구 장만에 전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돈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서, 우리 집에는 그 돈으로 사 나른 온갖 생활용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부유함을 얻게 된다면 우리에게 달라지는 것은 더 많은 비싼 생필품과 생활도구를 사 들이는 것일 것이며, 더 비싼 옷을 사고, 더 좋은 메이커의 구두를 사고, 더 좋은 식당에서 더 많이 가공된 비싼 음식을 먹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면서 생활수준이 더 높아졌다고 행복해하겠지.

어쩌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고, 더 좋은 차를 사서 몰고 다닐 수도 있겠고,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많이 만들어 놓거나, 땅을 사고, 아파트 몇 채를 사 놓을 수도 있겠고, 또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와~ 그러면 얼만 행복하겠나.

그렇게 부자가 되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런게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 그렇게 행복한가.

조금 가난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비싼 신발, 비싼 옷은 못 입겠지만, 때때로 시장에 나가 돈 만원 하는 신발과 옷가지들을 사 입을 수도 있고, 그걸 빨아서 입고, 기워서 입고, 고쳐서 입으면서 그 옷이 가져다 주는 고마움도 알 수 있고, 또 필요하다고 다 사지 않고 아끼고 아껴서 정말 필요하다 싶을 때 어렵게 구입 해 입었을 때 오는 그 짠한 행복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부자들에게 옷을 사 입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지 모르겠지만, 가난한이에게 옷을 사 입는 일은 아주 행복한 일이고, 설레는 일이 될 것이다.

부자들은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마다 외식도 자주 하고, 배달 시켜 먹기도 쉽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경치 좋은 식당이나 카페가 있으면 돈 걱정 없이 사 먹기도 쉬울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 다 먹을 수 있으니까.

부자들이 그러는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은 재래시장에 나아가 백원 이백원 주고 파도 사고, 양파도 사고, 감자도 몇 개 사고, 돈 만원만 가지고도 비닐봉지 한 보따리 장을 봐 와 가지고는 어머님의 따뜻한 손길로 따뜻한 마음까지 음식에 담아 소박하지만 맛깔스런 음식을 아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차려 줄 것이다.

때때로 외식도 하겠지만, 돈 때문이라도 잦은 외식은 할 수 없겠지.

어쩌다가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때 그 때 휙 사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빠 월급날 되면 그 때 함께 기념으로 외식을 하거나, 또 조금 더 유머와 지혜가 있는 부모님이라면 좋은 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려주고는 이 책을 다 읽고 함께 느낌을 나누고 나면 그 기념으로 외식을 시켜주겠노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보다는 후자의 경우에 더욱 음식에도 정성이 더하고, 몸 건강에도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나, 지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욱 삶을 진지하고 독립적이며 직접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차가 꼭 필요하면 차를 사면 되는데, 굳이 몇 천 cc 이상 가는 몇 천만원 이상 가는 기름도 많이 먹고 고장나면 부품값도 비싸고 외양만 크고 번드르르한 그런 차가 왜 필요한걸까.

가만 마음을 지켜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안의 ‘욕망’이 하는 일이다.

부자가 되기 보다는 조금 더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로와질 수 있다.

소로우의 말처럼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부자가 될수록 불가피하게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생활습관을 가지게 되기 쉽고, 그랬을 때 우리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만다.

인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가난의 정신이며, 일이 아니라 마음의 휴식이다.

돈을 벌어야 할 것 같고, 그러려면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그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얼마나 얽어매고 있는가.

물론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러하다 보니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완전히 일도 버리고, 돈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서는 언제든 가난하게 내적으로 휴식하면서 소박하고 진지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그런 용기와 지혜가 있기만 하다면 지금 이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집착하거나 중독되거나, 그 일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먼저 집착이 없어야 하고, 가난과 청빈의 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옛날 원시시대 사람들이 누려왔던 그런 풍요사회, 잉여경제의 삶을 왜 살지 못하겠는가.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더 얻고자 하니까, 더 벌어야 하고, 더 집착하고자 하니까 괴로워 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벌려고, 더 소유하려고, 더 집착하고, 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가.

지혜가 부족해서다.

만족과 나눔과 가난과 비움의 정신이 부족해서다.

삶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실천과 용기는 뒤따를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가 아직은 못 되기 때문에, 참된 앎이 못 되기 때문에,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에 머무니까 아직은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는 것일 뿐이다.

일단 버리고 나면 자유롭다.

마음에서는 버리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버리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내는 도리이니까.

옛날에 아무것도 없었던 원시인들도 저 깊은 행복과 평화를 느끼고 살았는데, 이토록 많은 것을 소유한 우리들이 여전히 부족하고 괴로울 이유가 무엇인가.

비우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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