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대매(大梅) 법상(法常) 스님에 대한 이야기

대매(大梅) 법상(法常) 스님에 대한 이야기

-법정스님-

9세기 당나라 때 스님이며 한국불교에도 영향을 끼치신 분입니다.

10代에 출가하여 온갖 경과 논에 통달하여 강의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은 말재주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깨닫는 데는 방해가 되는구나.’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경전을 읽어야 되겠구나 싶어 스승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조 스님을 찾아뵙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간절한 물음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卽心卽佛)” 여기서 법상 스님은 크게 깨닫습니다.

의문이 콱 풀려요.

“어떻게 지녀야 합니까?” “네 스스로 잘 보호해 가져라” 이 법문을 듣고 법상 스님은 얼마의 곡식과 종자를 구해 산중으로 들어갑니다.

이 산이 대매(大梅)산입니다.

매화가 많아서 대매산입니다.

그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부처인 줄 안 그는 이 마음을 살피고 쓸 줄을 알면 되었지 더 이상 바랄 것 없다 하고…

스승의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법문의 위력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법문이라도 한 구절이 내 마음에 닿아서 깨우침을 준다면 한평생 정신적인 양식이 됩니다.

법문의 위력은 간절한 마음으로 경전을 독송할 때 ‘이 경전을 읽으면서 내가 평생 먹고 쓰고 활용하여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이 얻어질 지어다’ 하는 염원으로 그 경전을 독송하십시오.

건성으로 하면 공덕이 없습니다.

법상 스님은 깊은 산에 들어가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살면서 좌선을 합니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있나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에 때문에 참으로 닦을 수가 있습니다.

유의하십시오.

깨닫기 전에 닦은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 닦는 행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것입니다.

깨달음은 한순간이지만 닦음은 늘 지속해야 할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거울이 밝은 바탕을 지니고 있지만 가만히 두면 더렵혀지듯이 우리 마음도 그런 것입니다.

그 스님은 잣나무 열매를 따먹고 연못에서 자라는 연잎으로 옷을 해 입습니다.

좌선할 때에도 여덟 치의 쇠로 만든 탑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옛 스님들의 이런 기행은 졸지 않기 위해서,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지니깐, 어떤 스님은 끝이 아주 예리한 송곳을 턱 밑에 대고 좌선을 했습니다.

졸면 찔리니깐, 졸지 않기 위해서죠.

법상 스님의 철탑은 그 도량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산문 밖의 세월은 사십년이 지났습니다.

한 자리에 사십년을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저력입니다.

한 집에서 삼 사십년을 지나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 곳에서 오래 살아야 그 터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기상, 기운)을 입을 수 있습니다.

자연이란 그런 기상과 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도량에 오래 몸두고 살면 그 수행자가 그 산이 됩니다.

그래서 벽장, 임제, 조주 스님 등 산 이름이 스님의 이름입니다.

40년이 지난 어느날 한 젊은 스님이 주장자 감을 찾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그 초막에 나타났습니다.

초막에 머리가 산발하고 풀옷을 걸친 스님을 보고 “스님께서 이 산에 들어와 산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까” 하고 여쭈었지요.

“둘레의 산 빛이 푸르렀다가 누-래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 (不知何歲月, 山中無日曆) 수행자는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오로지 최대한 현제를 살고자 하기 때문에 지나간 세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매든 스님이 나갈 길을 묻습니다.

“산을 내려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흐름을 따라 가라(隨流而去).” 시냇물을 따라 가면 사람이 사는 마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시간이 있으면 능선에 올라가서 길을 찾는 방법이 있고 물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때로는 앞이 콱 막히는 때가 있지요.

밤잠을 못자고 생명을 끊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고뇌를 할 때는 남들처럼 살라는 겁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자기 식대로 살려고 하니깐 자기 자로서 넓은 세상을 잴려고 하니깐 무리가 오는거죠.

흐름을 따라가면 범속(凡俗)하지만, 때로는 흐름을 따라가면 가볍게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산으로 내려간 그 젊은 스님은 자기 스승인 염관 스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염관 스님은 법상 스님과 도반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소식을 들은 염관스님은 법상스님의 하산을 종용했습니다.

“한 못의 연잎으로 걸치기에 모자람이 없고 몇 그루의 잣나무 열매로 먹고 남았네.

함부로 세인에게 거처가 알려졌으니 풀집을 옮겨 더 깊은 데로 들어가노라” 이렇게 말하고 법상 스님은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사는 스님들은 괴팍합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저에게도, 극성인 신도들이나 신문기자들이 어디 있드라 너만 알고 있으라 이런 식으로 다른이에게 말합니다.

호기심이죠.

정말 위한다면 가만 놔 두어야죠.

왜 그 사람 살림살이를 엿보려고 합니까.

그래서 나도 여차하면 떠나려고 후보지 서너군 데 보아 두었습니다, 여차하면 가려구요.- 웃음.

스승 마조는 한 제자를 시켜 찾아가서 묻게 합니다.

“스님은 이전에 마조선사를 친견했을 때 무슨 도리를 얻었기에 이 산에 숨어서 삽니까?” “마음이 부처라고 했기 때문이네” “선사는 요즘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非心非佛) 가르칩니다” 이 말을 듣자, 법상스님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 놈의 늙은이가 사람을 홀리고 있군.

비심비불이라고 하든말건 내 알바 아니야.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이야” 이 말을 전해들은 스승 마조 스님은 감탄합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성숙했다.

바른 경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때부터 대매산에는 이 삼년 안에 육 칠백명의 수행자들이 모여들어 호성사(護聖寺)라는 절이 생겼습니다.

신라의 기지, 충원 스님이들이 수학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확신이 그의 삶을 늘 새롭게 이끌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확신이 따라야합니다.

그래야만 남의 말에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참선, 염불, 주력 하시는 분들 잘 하고 있는데 누가 와서 참선보다 염불이 낫다하더라, 염불보다 주력이 낫더라 이런 소리에 흔들려 새로 하고 관세음보살보다 지장보살이 났다하더라 이런 말에 홀려서는 안됩니다.

같은 보살들이죠.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스님이건, 거사이건, 보살이든 잘 안된다고 새롭게 하려고 하거든요.

그것이 오래 가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그 마음이거든요.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오늘 처음 듣는 말이 아닙니다.

수 없이 들었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부처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이죠.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마음은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 내적인 체험이 없으면 관념적입니다.

화엄경에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확고한 믿음이 내적인 체험을 거쳐야만 공덕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단지 믿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행하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스님이 88세에 세상을 하직할 때 제자들에게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는 법상 스님의 말입니다.

사람을 피해 숨어살던 사람의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열매는 제대로 익어야만 열매 구실을 하지 익기 전에는 열매일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때로는 높이 높이 봉우리 위에 우뚝 솟을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겨야 합니다.

바로 이 비밀이 법상 스님의 그런 생애의 소식과도 이어집니다.

선지식을 찾아서 밖으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마음과 몸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또 이름에 팔리지 마세요.

아무개 스님, 아무개 누구, 이름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굳어져서 생명력을 잃은 관념적인 화두를 붙들고 허송세월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분명히 들으십시오.

이미 화두를 붙들고 생생히 부지런히 정진하는 분들에게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두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그냥 흉내나 내는 사람들은 그 진짜 살아 있는 화두가 되어야 하는데 이미 죽은 관념적인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이미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늘 마주치는 이웃과 상황, 이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화두라고 생각하세요.

화두란 선방에서 ‘이 뭣고” 하는 이것만이 화두가 아닙니다.

화두(話頭)란 삶의 절실한 과제입니다.

말로서 이론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의문을 화두라고 합니다.

선방에서 말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고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죽은 화두가 아니고 삶의 화두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만나는 이웃을 화두로 생각하십시오, 어려운 아웃을 귀찮게 생각지 마십시오.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자비심이란 것이 곧 부처이며 보살이기에 때문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꽃이든 나무이든 우리에게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깨워 준 그런 존재자가 곧 내 스승입니다.

우리가 헛눈 팔지 않고 깨어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 씩 이런 선지식을 마주치게 됩니다.

선지식은 결코 먼 데서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살펴야 합니다.

아까 말했든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상황을 거부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곳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