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법륜스님-
안약불수眼若不睡하면 제몽자제 諸夢自除요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사라지고 심약불이 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 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느니라.
잠자지 않으면 꿈은 저절로 없는 거지요.
잠을 자니까 꿈을 꾸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생각을 일으키니까 갖가지 분별을 내게 되지요.
생각을 놓아 버리면 분별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법문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듣다 보면 졸래야 졸 수가 없습니다.
안 졸려고 애쓴다는 것은 지금 졸고 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졸리면 차라리 자는 것이 낫습니다.
졸고 있으면서 안 졸려고 애쓰는 것은 쓸데없이 스트레스만 쌓는 짓입니다.
졸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서 잠을 깨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한번 보세요.
마음이라는 것이 한결같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지요.
죽을 끓이면 거품이 계속 올라오지요.
마음이란 게 그렇게 죽 끓듯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도 치듯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지요.
우리가 마음을 잘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를 잘 몰라요.
마음은 늘 끊임없이 변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자주 변하느냐? 찰나에 9백 번 생멸한다고 합니다.
일순간에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9백 번 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번뇌가 죽 끓듯 하는 그게 바로 지옥이지요.
지옥 중생은 찰나에 9백 번 나고 9백 번 죽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생겨나면 누가 와서 덥석 먹어 버리든지, 불로 지져 버리든지, 쇠창살에 꽂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강제로 죽입니다.
그렇게 죽어 버리고 끝나면 되는데 죽은 뒤 또 태어나요.
그럼 또 누가 와서 목을 쳐 버립니다.
그래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리면 또 태어납니다.
그러면 또 불에 지져 버립니다.
그러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잠시도 그 고통이 멈추는 시간이 없어요.
고통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무간 지옥이라고 하지요.
고통이 잠시도 쉴 틈이 없다는 겁니다.
지옥 중생의 생사가 그런데 인간의 번뇌도 찰나에 9백 번 생멸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마음을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 마음이 영원하다, 한번 결심하면 영원히 간다.’ 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번 사랑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죽어도 사랑을 해야 되고, 결혼할 때 ‘ 당신만을 사랑해요.’라고 약속했다고 결혼 10년 뒤에도 “당신 그때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하고 다그치지요.
이게 다 마음이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음이 찰나에도 9백 번 생멸한다고 할 만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면 항상함이 없습니다.
찰나 찰나 변화합니다.
결심을 한다고 한번 먹은 마음이 변하지 않는 그게 도가 아니고 ‘마음이라는 것은 찰나에 9백 번 생멸할 정도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무상한 것이다.
이게 마음의 실제 모습이다.’라는 걸 아는 게 도입니다.
마음이 항상할 수는 없지요.
시시때때로 상황 따라 변합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마음이 항상할 거라고, 항상한다고 잘못 알고 있어요.
그래서 찰나에 일어나는 자기 생각에 집착합니다.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처럼 각자의 업식이 다르면 같은 것을 보고 듣고 해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분별합니다.
그때 그게 서로 다르다고 하기만 해도 서로 싸울 일이 없지요.
‘네 눈에는 파랗게 보이냐?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데, 웬일이지? 왜 그렇게 보이지?’ 이러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혹시 안경 색깔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빨간 것을 왜 파랗다고 우기지?’ 라고 생각하면 10년을 싸워도 안경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피곤하지요.
그런 사람하고 같이 살려면 참으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안경을 벗으면 대화하려고 애를 쓸 것이 없어요.
이 애쓴다는 것은 잘못된 길에 놓여서 애를 쓰는 거예요.
세상의 이치로는 애를 써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하지요.
그런데 수행에서는 애를 쓴다, 노력을 한다고 하면 십만 팔천 리 멀어져 버립니다.
어긋나 버리지요.
참는다고 하면 수행이 아니에요.
참지 못하고 성질대로 하는 범부 중생에 비해서 참고 견디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는 착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해탈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착하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거나 착하다고 해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지요.
착한 사람일수록 괴로움은 더 많고, 명은 더 짧아요.
여자가 남편을 칼로 수십 번을 찔러 죽였다고 해서 아주 형편없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가 보니까 주위에서는 세상에 그런 여자가 없다고 그래요.
얼마나 참고 참았으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니까 눈이 뒤집어져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거예요.
그러니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안경을 벗어 버리면 둘이서 의견을 조율하려고 애를 쓸 게 없어요.
삼라 만상이 서로 다른 것은 갖가지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한결같다고 하면 한번 일으킨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걸 보통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질 때 파도 하나에 집착하면 생멸이 있지만,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다 전체로 가만히 보면 그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물이 출렁거리는 것일 뿐입니다.
바다는 한결같지요.
바람이 불면 출렁거리는 것으로 한결같지요.
있는 그대로죠.
한결같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냥 저 벽은 저 빛깔로 그대로 있는데 우리들이 각자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서 색깔이 붉게도 보이고, 푸르게도 보이고, 검게도 보이는 거죠.
마치 한 벽의 색깔이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보이고 저 사람한테는 저렇게 보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것은 우리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벽은 늘 있는 그대로예요.
이걸 공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