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발원과 발원기도

발원과 발원기도

-법상스님-

1.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참회가 된 마음은 과거에서 기인하는 어둡고 탁한 망상과 번뇌, 죄의식과 오염들이 정화가 된 고요하고 텅 빈 마음이다.

이렇게 고요한 마음에서 한생각 일으켜 원력을 세운다면 그 원력에는 강력한 힘이 붙게 되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이 된다.

사실 모든 마음에는 강한 현실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 마음은 온갖 죄의식과 망상, 분별심, 번뇌 등으로 오염되어 있거나, 원하는 마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 모든 마음에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현실로 이루어지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부분의 마음은 서로 다른 극성의 두 가지로 치닫기 쉽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내지만 지금 이대로는 너무 가난하다고 여기거나 이 연봉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김으로써 마음 속에 ‘가난’과 ‘결핍’감을 키우는 것이다.

즉 한 쪽에서는 부자를 원하고, 다른 한 쪽에는 가난과 결핍이 연습되기 때문에 에너지가 정확히 양 극의 두 쪽으로 분산되고, 결국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똑같은 현실만 계속되곤 하는 것이다.

참된 발원은 그래서 참회와 용서를 통해 먼저 마음이 정화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2.소원과 발원의 차이

그러면 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발원이란 말 그대로 원을 세우고 일으키는 것이다.

원이란 원하는 것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원과 발원은 차이가 있다.

소원은 개인적인 아상과 에고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을 말한다.

그러나 발원은 아상을 넘어서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원력이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개인적인 소원일 경우에는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발원은 똑같이 ‘부자가 되기를 발원’하는 것이지만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부자가 됨으로써 가난한 보다 많은 이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이타적인 원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이 복 지은 바를 가져다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 지더라도 그것은 인과응보의 틀 속에서 내가 지은 복이 있을 때만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타적인 발원은 나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우주적인 서원이기 때문에 그 사람 개인의 복력을 넘어서는 무량대복의 공덕이 붙고,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가 그 서원에 힘을 보태주게 된다.

이처럼 발원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힘,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불자는 아상에 기초하는 이기적인 기복의 기도를 행할 것이 아니라,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발원을 함으로써 이 우주법계에 회향해야 한다.

그래서 절에서 방편으로 기도를 하라고 할 때도 ‘내 아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내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고, ‘아들 건강해 져서 이 사회에 큰 도움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남편 승진하여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과 지혜를 베풀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전자는 그 근본에 ‘나’라는 아상의 기복이 깔려 있지만, 후자에는 그 근본에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가 깔려 있다.

3.발원의 핵심은 자비심

이상에서처럼 발원의 개인적인 소원과 달리 일체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이타적인 서원력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목적과도 연결된다.

불교의 목적, 수행의 목적을 보통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불교의 목적,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닌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력에 있다.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심이 그 원동력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발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열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 안락을 주기 위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불지혜를 주기 위해, 공양 공경하기 위해, 법을 듣고 환희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보기 위해, 광대한 지혜에 들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고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리심을 낸다”라고 함으로써, 발원의 이유가 오로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임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발원의 핵심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을 여의게 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다.

발원을 세우는 이유는 발원한 바 대로 살기 위함이다.

즉 우리 삶의 핵심적인 목표 또한 우리가 발원하는 바와 같이 일체 중생을 위하고, 일체중생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을 전해주며 고통을 없애줄 수 있을까 하는 이타적 발원이 원동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타인들을 돕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발원이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나’를 위한 삶에서 ‘일체중생’을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전환하게 해 준다.

4.발원의 정의

발원(發願)이란 스님 또는 신도가 불법승 삼보님께 자신과 대중의 바람과 원하는 바를 일으키고 발함으로써 자신의 원력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告)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신이나 절대자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비는 것과는 다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원은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타인의 희생에 기초한 나의 행복을 원하는 등의 소원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緣起)적 진리와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자비심에 기초하여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이타적인 서원을 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이타적인 서원을 발하여 부처님께 고하여 발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강력한 발현의 힘을 가진다.

부처님 전에 이타적으로 세운 발원은 안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 사리불과 목건련보다 일찍 출가한 1,000여 명 이상의 비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상수제자로 선언한 이유 또한 그들이 더 잘나서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 전생에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기를 서원했던 원력 때문임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이타적인 원력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께 고한 부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며, 개인적인 사사로운 소망이 아닌 우주법계를 돕고자 하는 이타적인 발심이기 때문이다.

발원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 약사여래의 12대원 등과 같이 불보살님께서 세운 개별적인 서원인 별원(別願)이 있고, 사홍서원과 같이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세워야 하는 총원(總員)이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발원은 불보살님이나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하는 축원과는 달리 발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는 누구나 자신의 삶의 등불이 되어 줄 서원을 발해야 한다.

5.발원문의 구성

보통 불자들이 개별적인 발원문을 세우려고 하지만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올바른 발원문을 세우려면 먼저 발원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발원문은 대체로 다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삼보님께 귀의를 다짐하는 귀의분(歸依分), 둘째로 지어온 바 죄업이 소멸되기를 바라며 뉘우치는 참회분(懺悔分), 셋째는 원하는 바의 발원 내용을 하나하나 부처님께 아뢰는 행원분(行願分) 혹은 발원분(發願分)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원문의 마무리로서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되돌려 회향하며 불국토 성취를 기원하는 회향분(廻向分)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때로는 불보살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찬탄분이 추가되기도 한다.

아래에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상발원문’에서 어떻게 귀의, 참회, 발원, 회향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자.

[귀의]

“시공을 초월해 항상 하시는 부처님.

저희들은 그동안, 밝은 부처님의 성품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마음을 돌이켜 본래 고향인 부처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거룩한 삼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참회]

“저희들은 너와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모른 채 나만 생각하며 살아왔고, 나와 내 것이 영원하지 않은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무명과 애욕에 가려 어리석게 살아 온 지난날을 참회합니다.

욕심 많고 화 잘 내고 어리석어 저질러 온 모든 잘못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옵니다.”

[발원]

“거룩하신 부처님, 이제 저희들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기를 서원합니다.

위로는 수행과 정진으로 깨달음을 이루고 아래로는 모든 이들의 참된 행복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합니다.”

[회향]

“저희들의 이러한 참회와 발원, 수행과 나눔의 공덕을 온 우주법계로 널리 회향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시어 저희들의 간절한 발원이 원만히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 공덕으로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행복과 평화가 항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6.개별 발원문 작성

이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생활 속에서 심출가 수행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발원을 세워야 한다.

발원의 종류에 총원과 별원이 있듯이, 대승보살의 기본적인 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나, 사홍서원과 같은 총원이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발원이 되어야 하겠지만, 저마다 자기만의 발원을 세움으로써 자기다운 방식으로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원, 개개인의 별원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발원을 세우는 방법은 불보살님들의 총원이나 별원처럼 몇 가지를 정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서원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발원문을 만들어 기도 수행할 때마다 수시로 독송하며 발원을 더욱 굳게 해 나갈 수도 있다.

보통은 후자를 많이 한다.

앞서 발원문의 구성을 살펴보았듯이 발원문은 처음에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참회를 한 뒤 본격적인 발원을 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이러한 발원문의 구성을 보면, 오늘 원고의 제목인 귀의, 참회, 발원과 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발원문이야말로 그 안에 귀의와 참회, 발원 그리고 회향까지 수행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중심이 되는 나침반과도 같은 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개별 발원문을 작성할 때는 너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원문을 써도 좋고, 형식을 갖추고자 한다면 위에서 설명한 귀의, 참회, 발원, 회향 등이 잘 드러나게 쓰면 더욱 좋다.

다만 직접 다 쓰기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위 발원문의 구성 중에서 특별히 행원분의 끝부분에 자신 개인의 발원 내용을 추가하여 자신의 개인 발원문을 만들 수도 있다.

혹은 특별히 참회할 내용이 있다면, 참회부분에 자신 개인의 참회 내용을 추가할 수도 있다.

7.발원문을 독송하는 순서

보통 신도님들께서 발원문은 언제 읽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이렇게 작성된 발원문은 절이나 집에서 개인 기도 수행을 할 때는 독송이나 주력, 참선이나 절 수행 등 개인 수행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마지막 순서로 수행의 끝부분에 발원문을 읽는 것이 좋다.

물론 법회 식순에서는 중간에 발원문을 봉독하기도 하지만 사홍서원이라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서원을 마지막에 봉독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설명했듯이 원력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므로, 수행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 한 생각 일으켜 서원을 발원한다면 발원에 산란심이나 번뇌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더 큰 힘과 집중이 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시작할 때는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하고, 온갖 번뇌와 망상들이 들끓기 때문에 그 때 발원문을 읽어도 발원에 힘이 붙지 않지만, 수행과 기도를 통해 마음을 청정히 하고, 비워져 마음이 고요해 진 뒤에 간절히 원하는 서원을 읽음으로써 부처님께 발원하게 된다면 텅 빈 가운데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가 붙기 때문에 발원이 이루어지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8.발원의 공덕

발심의 공덕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경전은 『화엄경』이다.

『화엄경』에는 발원, 발심, 발보리심, 보리심이라는 용어로 다양한 발원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내가 옛적에 큰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는 많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발심한 뒤로는 그것들을 다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제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거나 무서워하지도 않고, 온갖 마의 무리와 외도들이 깨뜨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보리심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며 모든 불법의 공덕과 같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보살의 행을 낳게 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여래가 모두 보리심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는 이는 한량없는 공덕을 이룬 것이며, 일체지를 증득하여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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