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내 살림살이
법정스님
한 열흘 남짓 떠돌아다니면서 끼니마다 해놓은 밥 얻어먹다가 돌아오니 끓여 먹는 일이 새삼스럽네.
버릇이란 고약해서 남이 해주어 버릇하면 자신의 능력을 접어둔 채 의존하려는 타성이 생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이 타성에 속지 말아야 한다.
타성에 길이 들면 자주적인 능력을 잃고 게으름의 늪에 갇힌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너무나 막연하다.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함이다.
따라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현존재다.
자, 그러면 나 자신은 오늘 어떤 삶을 이루고 있는가 한번 되돌아보자.
바깥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방이 많이 식었다.
예정보다 30분쯤 늦게 일어났다.
지난밤 자다가 깨어 허균이 엮은 (한정록-숨어 사는 즐거움)을 다시 읽었다.
옛사람들의 자취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가를 배울 수 있다.
가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사는 일이 풍류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예불을 마치고 나면 냉수를 두 컵 마신다.
공복에 마시는 냉수 즉, 찬물은 목을 축일 뿐 아니라 정신까지 맑게 씻어준다.
언젠가, 스님의 건강 비결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냉수 많이 마시고 많이 걷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살아 있는 냉수를 멀리한 채 끓여서 죽은 물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커피를 비롯해서 각종 음료들은 살아 있는 생수가 아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라면 즐겨 마실 것이 못 된다.
목이 마를 때는 수시로 생수를 마신다.
땅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제 발로 걷지 않고 자동차에 의존하면서 건강을 잃어간다.
제 발로 걷는다는 것은 곧 땅에 의지해 그 기운을 받아들임이다.
그리고 걸어야 대지에 뿌리를 둔 건전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땅을 등지고는 온전한 삶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물든 잎들을 내다보고 있다.
지고 남은 잎들도 머지않아 가지를 떠나갈 것이다.
그 빈 가지에는 또 겨울 나그네인 눈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또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아침 식탁에서 바흐의 판타지와 푸가를 들었다.
며칠 전 취리히에 들렀을 때였다.
그곳 성모성당에 샤갈의 마지막 작품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남아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성당 한쪽에서 때마침 파이프 오르간을 조율하던 참이었다.
조율이 끝나고 조율사는 음악을 한 곡 들려주었다.
성당에서 듣는 파이프 오르간의 그 장엄한 소리는 내 속에 긴 먼지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성당에서 기념으로 산 CD를 오늘 아침 들었다.
건전지로 돌아가는 조그만 ‘소리통’이라 그날의 장엄한 울림에 견줄 수는 없지만 음악이 주는 느낌은 느슨한 감성의 줄을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그리고 자동차로 멀리 지루한 길을 달릴 때는 이따금 야니의 역동적이면서도 감미로운 가락이 쌓인 피로를 씻어준다.
또 무엇을 먹는가.
아침은 대개 빵 한 쪽에 차 한 잔.
바나나와 요구르트가 있을 때는 그것을 한 개씩 곁들이기도 한다.
점심과 저녁을 위해 미리 쌀과 잡곡을 물에 불려둔다.
밖에 나갔다가 오두막에 늦게 들어올 때는 햇반의 간단하고 편리함에 기댄다.
혼자서 지내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이 먹는 일에 얽매이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이것저것 너무 많이 먹어대기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다.
음식물 쓰레기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과식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먹는 것만으로 건강이 유지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맑은 공기와 맑은 물, 그리고 안팎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생활 습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평생 자신을 위해 수고해주는 소화기를 너무 혹사하지 말고 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야 한다.
출출한 공복 상태일 때 정신은 가장 투명하고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