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피로써 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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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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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가대표 축구선수로서 이름을 날렸던 차범근 감독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상대팀 선수의 과도한 반칙으로 경기도중 허리를 심하게 다쳐 입원은 물론 큰 수술까지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보험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며, 돈도 많이 벌어놓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되니, 이제 그나마 있는 돈도 다 쓰고 나면, 귀국해서는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르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팀에서는 과도한 파울을 한 상대팀 선수를 고소하여 치료비라도 받아내라고 권유하였다고 합 니다.
그때 차 감독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고소장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독일 언론에 주목 받게 되면서 병실은 위로의 꽃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상대팀 선수와는 한 팀에서 뛰게 되어 좋은 사이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차 감독의 일화는 사랑과 인내의 결과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라디오방송에서 이러한 내용을 들으면서, 차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주라’는 사랑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와는 다른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는 식의 대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과오를 응징하는 대신 자비심으로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참다운 종교인이 아니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예컨대, 같은 종교인을 표방할지라도 어떤 국가의 지도자는 테러에 반 테러로써 과도한 응징을 하여, 결국 세계를 테러의 악순환이라고 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피는 피로써 씻을 수 없다’는 《법구경》의 말씀을 들지 않더라도, 결과가 눈에 보이듯 뻔한 시행 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인 것 입니다.
이런 말을 하니, 어떤 이가 반문합니다.
치열한 경쟁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세상살이에서 그렇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다가는, 오히려 사람을 우습게 보고 완전히 짓밟을 것이고···.
하지만 그럴까요? 세상은 그렇게 어눌하지가 않습니다.
인과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되고 있지요.
피는 피로써 씻을 수가 없습니다.
원한을 원한으로써 갚는다면, 더욱 더 큰 원한이 생겨 악순환이 쉬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로써 씻어야 합니다.
물론 매사에 참고 양보하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주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한 상대방을 응징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 들이 단순히 복수심에 불타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응징을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분노를 푸기 위한 응징이 아니라, 그릇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로서의 응징 말입니다.
나아가, 시기와 장소 그리고 상대방을 잘 선택할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무모합니다.
지혜가 없다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지 분간하 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또한 자비를 베푸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길이라는 확신도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없는 지혜는 건조합니다.
세상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의 감정에 많이 지배 받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먼저 용서 하고,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종교인이 몫이 아닐 까요? 지금 여기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복수를 하고 용서를 하며 살았는지 말입니다.
혹여 그 복수라는 것이 오히려 나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지도 말입니다.
실체 없이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미움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정히 용서하기가 힘이 드신다면 그냥 놓아두십시오.
당신의 마음 한 쪽에 꾸어다 놓은 보리 자루처럼 상관하지 말고 그냥 놓아 두십시오.
바로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