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단지 그러할 뿐

단지 그러할 뿐

/ 법상 스님

이 많고 많은 세상 사람들,

이 복잡다단한 생각과 사상, 주의들,

많은 나라, 많은 일들, 많은 직장,

많은 말들, 많은 건물, 많은 짐승들,

많은 나쁜 일 그리고 좋은 일들,

세상은 참 복잡하고 정신이 없기도 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많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음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언뜻 보면 복잡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세상이라지만

사실 이 세상은 연기라는 법칙성에 의해

참으로 온전히 짜임새 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제각기 모두가 단지 그러할 뿐입니다.

이렇게 가지런히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나무는 덩치가 크다고 작은 잔디를 탓하지 않으며,

작은 잔디는 키 작음에 분별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넓다고 산 속 졸졸 흐르는 개울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나무는 바다를 탓하지 않고,

새들은 바닷고기들을 탓하지 않는 법입니다.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일 뿐.

그냥 제 나름대로의 성품을 온전히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산이 되고 싶은데 물이 되었다고 괴로워하지 않으며,

작은 꽃들은 덩치가 작다고 큰 나무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은 꽃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고,

큰 나무는 나무 나름대로의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뭇 생명 생명들은 서로 시비가 없습니다.

단지 그러할 뿐입니다.

잔디는 잔디대로 작은 이유가 있고,

나무는 나무대로 큰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잔디가 작다고 나무처럼 크고 싶어 한다면

나무만큼 자라는 그 순간

이미 잔디로서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며,

나무가 작아지고 싶다고 잔디처럼 된다면

그것을 나무라 하겠습니까.

산은 산대로 지(地)의 습성이 있으며,

바다는 바다대로 수(水)의 습성이 있고,

불은 불대로 화(火)의,

바람은 바람대로 풍(風)의 기운이 있는 법입니다.

산이 바다가 되려 해서도 안 되고,

바다가 불이 되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그러할 뿐입니다.

산은 그대로 산일 뿐, 바다는 그대로 바다일 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입니다.

누가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산은 산대로 옳으며 바다는 바다대로 옳을 뿐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시비 분별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독 사람들만이 시비와 분별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

키가 컸으면 좋겠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소처럼 유순했으면 좋겠고, 사자처럼 당당했으면 좋겠다,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사람, 동물, 식물 가리지 않고 비교의 대상을 만듭니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의 연속 연속입니다.

바로 그 시비 분별 속에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물은 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소는 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산은 산대로, 새는 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스스로 온전할 뿐임을 모르고 삽니다.

본래 세상은 그대로 고요할 뿐이지만,

우리의 고집이며 시비 분별 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단지 그러할 뿐’인 고요하고 온전한 세상에

괜한 시비를 겁니다.

그런 모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등은

‘내가 옳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다보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려는 고집,

아집(我執)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집대로 되면 행복이지만,

고집대로 되지 않으니 괴로워합니다.

그 어리석은 분별을 유독

우리 사람들만이 짓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분별만 놓아버리고 나면

고집할 게 없게 되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그대로 평온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없으니 모두가 옳게 되기에

무엇이 옳으니 그르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싸울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지금 처해있는 이 모습 그대로가 나인 것입니다.

지금 나의 성격 그대로,

인물이며 몸매, 능력, 지위, 환경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온전한 ‘나’인 것입니다.

‘나도 누구누구처럼 되고 싶다’ 고 분별 짓는다면

이미 그 사람이 되어있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닙니다.

그 누구누구라는 비교 판단의 대상이 서는 순간

나의 중심은 흔들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괴로움, 답답함, 조급, 우월과 자괴감 등

온갖 분별고(分別苦)가 시작됩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런 분별도 붙지 않고 그저 ‘나’일 뿐입니다.

산이 그대로 산이며, 물이 그대로 물일 뿐이듯 말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다른 무슨 분별이 붙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잘났고 남이 못남도 없고,

남보다 내가 못날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가장 이상적이고 온전한 모습인 것입니다.

시비 분별만 붙지 않으면 됩니다.

내성적인 성격과 외향적인 성격 중에

누가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학 잘하는 사람과 영어 잘 하는 사람 중 누가 옳습니까.

운동을 잘하는 사람과 공부를 잘 하는 사람 중 누가 옳습니까.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중 누가 옳습니까.

꼼꼼한 사람과 털털한 사람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옳고 그름이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잣대일 뿐입니다.

고정지어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다라고 붙일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나에게 그러한 능력 없음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온전한 참, 절대 참인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또 누구를 부러워하고 무엇을 갈망하겠습니까.

지금 이대로의 모습 그대로가 온전히 밝은 나의 모습입니다.

산이 그대로 산이고 물이 그대로 물이듯

나는 그대로 온전한 ‘나’인 것입니다.

산과 들이 맞바꾸려 하지 않듯,

바다가 하늘을 꾸짖으려 하고 부러워하지 않듯,

나는 온전한 나임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 그 누가 나를 온전한 주인공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그러할 뿐, 단지 ‘나’일 뿐이기에 나인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비교의 대상으로 잡지 마시고,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시면 됩니다.

지금의 나에 큰 만족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 모습 그대로의 나에

세상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이면서

세상과 하나인 이 아름다운 ‘나’에게 말입니다.

그럴 때.

.

.

바로 내가 주인공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님,

자성부처님입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