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누구라도 행복해 질 수 있다

누구라도 행복해 질 수 있다

-법상스님-

지금 괴로움에 치를 떨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직장에 취직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 회사에서 퇴출되어 자식과 부인 볼 면목 없는 사람,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답답한 사람, 돈을 많이 벌지 못해 경제력이 많이 쪼들리는 사람, 남들은 다 승진하는데 승진 못해 미치겠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사람, 높은 지위와 계급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떨어진 사람…

어떤 사람이라도 좋다.

그 누구라도 바로 이 현실 속에서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인 것 만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가능한 일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가치관이며 생각, 고집들을 바꿀 수 있는 실로 엄청난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의 힘이 필요하다.

행복을 찾는 일.

그것은 의외로 아주 간단한 곳에 해답이 있다.

누구라도 다 알만한 답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더없는 진리이고 참된 삶의 원천이다.

바로 욕심을 줄이는 일,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이렇게 흔한 말이 나오면 내심 기대했던 사람들도 콧방귀를 뀌면서 이 글에 대한 기대감은 잔뜩 떨어지고 말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고 매번 들어보던 말인데 새삼스레 또한번 중복해서 들을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이것은 진리이다.

이 말은 진리 그대로의 실천이다.

내 마음 속에서 별다른 의미없이 이 말을 듣게 되면 이 글이 끝날때까지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수 있지만 마음 하나 돌이켜 내 삶 전체를 걸고 진지하고 소중하게 들을 수 있다면, 그간의 고정관념이나 고집들을 다 놓아버리고 들을 수 있다면, 분명 지금 이 말은 내 삶을 획기적으로 경이롭게 바꿀 수 있는 소중한 말이 될 수도 있다.

부디 그렇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사람들은 보통 욕심을 늘려가는데서 행복을 느낀다.

욕심이 늘어나고 그 욕심을 성취하고 더 큰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집착을 하고 그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그 속에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고 행복을 느끼고 산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의 방식이고,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삶의 방식을 교육받아왔고 강요받아 왔으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려 왔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라고 철저하게 쇠뇌당해 왔다.

그러한 철저한 쇠뇌가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초중고등 교육의 현실이다.

오직 욕심을 충족하는 일, 그러기 위해 남보다 앞서 나가는 일, 높은 지위에 오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높은 자리에 승진하는 일, 그러한 남의 위에서 남 앞에 군림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강요당해 왔고 교육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성공하길 원한다.

즉 누구나 더 많은 것을 갖길 원하고, 누구나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길 원하고, 누구나 남보다 더 성공하길 원하고 있다.

왜? 그것이 행복이니까.

과연 그러한가? 그렇게 욕심을 채우는 것 그것이 행복의 궁극적인 모습인가.

돈 많이 버는 것이 그대로 행복인가, 명예, 지위, 계급 올라가는 것이 그대로 행복인가, 학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그런 것이 그대로 행복인가.

참된 행복이란 소유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것이라야 한다.

내 바깥의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바깥의 조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돈도 많았다가 적어질 수 있고, 사업도 커졌다가 작아질 수 있고, 이 세상 모든 조건들은 변화하기 때문에 내 바깥의 조건들에 내 행복을 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 바깥의 조건들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들이고, 또 분명히 변하는 것이고,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궁극적인 행복으로 데려가 주지 못한다.

그것은 언젠가 괴로울 것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참된 행복은 내 안에서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참된 행복은 욕심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 그 자체를 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라야 한다.

욕심의 충족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면 내 외부적인 조건들의 좋고 나쁨에 따라, 욕심의 대상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나의 행복은 그 욕심에 좌지우지 되고 만다.

욕심 그 자체를 줄이고 놓아버리면 내 바깥의 조건들이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계급, 명예,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내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 행복이 참된 것이다.

그러면 우선 나 자신을 살펴보자.

나는 괴로운가.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괴로운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러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궁극의 욕심을 벗어버리면 된다.

욕심을 줄이고 비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잘 안된다.

지금까지 내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하고 비웃으며 불쌍하고 가엽게 생각할 지도 모르고, 업신여길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첫째로 내 안에서 욕심을 도저히 줄이지 못한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욕심을 버렸을 때 더 큰 근원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우선은 욕심을 놓아버렸을 때 내 삶의 획기적인 변화와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내 안에서 완전하게 믿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준비과정이다.

그것은 혁명적인 마음의 변화이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고 또 실제로 그렇게 마음 내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참이고 진리인데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면 바로 욕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 아직 그렇지 못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익혀 온 ‘욕심 충족’의 습관이 그 마음에 자꾸 의심을 가져오게 하고, 또하나 이 세상이 하나같이 모두 욕심을 충족하는 쪽으로만 가다보니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 먹은 사람이라도 그 다음 실천을 하려고 하면 여기에서 막혀버린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 녀석 성공도 못하고 저러고 사네’ 하는 욕설이 두렵다.

이를테면 욕심을 다 놓아버리고 취직이며 승진이며 돈 많이 버는 것이며 다 놓아버리고 어디 조용한 시골에서 소박하게 농사지으면서 욕심을 줄이고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그 마음을 실천하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이다.’ ‘삶에 실패해서 시골로 도피한 사람이다.’ ‘그 좋은 대학까지 나와서 시골가 농사짓고 산다’ 심지어 부모님 볼 면목도 없어질 것이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나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4년제 대학을 나온 졸업생이 최초로 환경미화원이 되었다는 보도를 들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는 자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당연할 수 있는 사실이 보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러한 욕심을 줄이고 사는 것이 뉴스거리가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여대생이야 당당하게 그렇게 사는 것이고, 뉴스에서도 직업귀천이 없다는 투의 기사였겠지만 그만큼 욕심을 줄인다는 것이 뉴스가 될 정도이니 어느 누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 욕심을 줄이고 살 수 있겠나.

좋은 회사 높은 위치에 근무하다가 하루 아침에 실직을 하고 취직을 못해 괴로운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욕심에 있다.

그만한 회사에 버금가는 비슷한 직장에 들어가야 내 채면도 살 것이고,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볼 면목도 생길 것 아닌가.

조금 나아가 나는 까짓거 아무데나 취직해도 되지만 가족들이 기죽고 사는 것은 못 보겠다고 할 것이다.

이 세상이 다 욕심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세상과 똑같이 흘러가다가는 지금 그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과감한 삶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걷는다고 나까지 그렇게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금 못한 직장에 취직을 하면 어떤가.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남들에게 칭찬받고,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남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은 그런 아상을 버리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상을 버리는 것이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용기라는 것은 바로 아상을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지혜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이 참된 수행자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다.

좋은 대학 진학하지 못해 괴로운 사람? 그 괴로움의 실체도 결국에는 내 욕심에 있다.

좋은 대학이 그대로 행복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즈음 보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더 취직 잘하고, 전문대 나온 사람이 취직 더 잘한다.

어찌보면 그만큼 내가 배웠다는 상을 안내고, 직업의 좋고 나쁜 것 따질 것 없이, 취직을 해서 그런 것이겠지.

바로 그런 것이다.

좋은 대학 나왔다는 상이 있으면 그만큼 좋은 직장을 취직해야 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바로 그것이 욕심의 실체.

우리가 비우고 놓아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은 이유도 다 내 욕심인 것이고, 좋은 직장을 취직해야 겠다는 것도 다 내 욕심이다.

물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여 원하는 일을 순조롭게 물 흐르듯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인연따라 내 몫이라면 그것에 만족하면서 그렇다고 상 낼 것 없이 자연스레 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좋은 학교 못가고, 좋은 직장 취직 못하면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롭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욕심을 놓아버리면 되는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괴롭다는 것도 알고보면 다 욕심이 하는 일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람에 대한 욕심이 집착을 낳는다.

무엇이든, 그것이 일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욕심이 앞서면 그르치고 만다.

욕심이 앞서는 일은 언젠가 분명 시련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면 그것도 분명 내 몫인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몫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힘들다고 괴롭다고 해서 자꾸 벗어나려하면 안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들고 괴로운 것은 다 싫어하고, 즐겁고 기쁜 일만 찾으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착한 일, 좋은 일만 하고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힘든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힘든 일이 있을 땐 그것이 다 내 과거 악업의 과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일은 오히려 내 업을 맑게 비워줄 수 있는 소중한 업장소멸의 순간이고, 마음을 비우는 순간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내 몫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가만히 내 마음을 비추어 보아 이 괴로움에 대한 내 욕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고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을 때 그 괴로움에 대한 업장이 해탈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근원적인 삶의 실천을 의미하고, 부처님의 삶, 하느님의 삶으로 나아감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들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 길이니만큼 그 길에는 어느정도 진통이 따르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는데서 오는 패배감이나 좌절감, 남들의 손가락질 그런 것들에서 한생각 크게 돌이켜 벗어날 수 있어야 이제 부처님의 삶의 길, 또 인류를 거쳐간 수많은 현자들이 걸은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 미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욕심을 비우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고, 욕심을 비우는 것이 실패하는 것 같겠지만, 바른 눈으로 보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정견의 법계의 안목으로 본다면, 욕심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운 길이고, 욕심을 채울려고 애쓰는 것이 더 실패하는 쪽에 가깝다.

내 몫은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욕심이 많으면 그만큼 성취해야 할 것도 많고, 그만큼 삶이 번거롭고 무거워진다.

그랬을 때 작고 소박한데서 오는 참된 행복을 놓치고 살 수 밖에 없다.

농사짓는 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흐름을 다 보고 산다.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낙엽 떨어지는 것에서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

그러나 서울에서 높은 지위에 있고, 사장, 국회의원, 회장, 부장, 뭐 그런 것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고, 마음에 해야 할 일이 많고, 근심 걱정이 끊일 것이 없겠나.

그런 무겁고 번잡한 마음에 작고 사소한 행복감을 어찌 느낄 수 있을까.

근원적인 행복이 무엇인가.

근원적인 행복은 욕심을 충족하는데서 오는 행복이 아니고 그 욕심을 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행복이라고 했다.

과연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괴로운가.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 욕심의 실체를 바로 관해 보고 그것을 놓아버리면 괴로움도 놓여지게 마련이다.

욕심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아상을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욕심을 놓아버리고, 아상을 놓아버릴 수 있는 내적인 힘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수행력이고 생명력이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왜 보고 사는가.

주변 시선에 걸릴 것 없다.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답답하고, 그런 사람일수록 많이 휘둘리는 사람이고, 내적인 생명력이 취약한 사람이다.

욕심을 버리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법계의 눈에서 볼 때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주인공이다.

물론 욕심을 가지고 바라는 바를 원만히 실천하며 살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라도 욕심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욕심을 충족하면서도 버리고 사는 사람이다.

다 제 몫이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대그룹 회장이 옳은 것이냐, 산사의 고요한 암자에서 노니는 노스님이 옳은 것이냐, 대통령이 옳은 것이냐, 다 버리고 여여하게 살아가는 농부가 옳은 것이냐, 그것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그냥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바다와 산이 다르고 별과 달과 태양이 서로 다르듯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의 모습이 아니고,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세속적인 모습이 아니고, 높은 지위에 있느냐 낮은 지위에 있느냐가 아니고, 좋은 직장 나쁜직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얼마만큼 욕심을 버리고 사느냐, 얼마만큼 마음을 비우고 사느냐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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