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웰빙과 웰다잉

웰빙과 웰다잉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스님

마음의 옷, 몸뚱이 잘 벗는 것이 ‘웰다잉’ ‘참살이’라고 번역되는 웰빙에 관한 관심과 더불어 자연스레 웰다잉이 부각되고 있다.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피할 수 없이 대면하게 되는 것이 웰다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웰다잉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잘 죽기? 혹은 잘 가기?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굳이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잘 벗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벗는다고 하면, 옷 벗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참으로 옷을 잘 벗어야 한다.

몸뚱이는 그야말로 마음의 옷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부인이 넷인 사나이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선고받은 그는 평상시 첫째로 애지중지하던 부인에게 죽음에의 동행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색을 하며 ‘살아서는 함께 떨어질 수 없었지만, 죽음까지는 결코 동행할 수 없다’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낙심천만하여 둘째로 사랑하던 부인에게 말했으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

‘가장 아끼던 부인도 안 가는데 내가 왜 갑니까?’ 하는 것이었다.

셋째부인에게 말하니, ‘장지까지는 따라가지요’하였다.

마지막으로 평상시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넷째부인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끝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사나이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당신에게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어야 하는 건데.”

죽음 자체는 희비 가릴 수 없어 살아생전 지은대로 평가받아 이 비유담에서 첫째로 애지중지하던 부인이란, 다름 아닌 몸뚱이를 말한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가꾸어주고자 한평생 애를 쓰지만, 죽어서 가져갈 수는 없다.

둘째로 사랑하던 부인은 재물이다.

어떤 부자는 자신의 임종에 즈음하여 장례식에서 자신의 빈손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아무리 부자라도 죽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가야함을 밝힌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이는 죽으면서도 재물에 애착하여, 아끼던 보배 반지들을 열손가락에 끼고 예금통장을 움켜쥐고 죽었다.

죽고 나니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자손들로 하여금 억지로 손가락을 잘라내는 불효를 저지르게 하였다고 한다.

셋째로 사랑하던 부인이란 일가친척과 친지 등을 말한다.

죽고 나면 장지까지는 따라오지만, 관 속에까지 따라 들어오는 이는 없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돌아보지도 않던 부인이란, 바로 마음을 뜻한다.

몸뚱이는 옷 갈아입듯이 갈아입을 수 있지만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닦았으면 닦은 대로, 못 닦았으면 못 닦은 대로, 업장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죽는 것을 ‘몸 벗는다’ 혹은 ‘몸 바꾼다’고 말한다.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어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다.

더 좋은 옷을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런 경우를 이른바 웰다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생전 복덕을 많이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잘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치고 기뻐할 일이다.

다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한이 있어 슬프겠지만, 간 사람에게는 잘 된 일이다.

인생이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쁜 옷을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살아생전 제대로 복을 짓지 않았거나, 마음공부를 소홀히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다.

가엾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세상의 어두움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불교신문 2240호/ 6월28일자]

잃어버린 섬 (Lost In Island) – Piano Version – 이루마(Yir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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