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욕심과 서원___그 엄청난 차이

욕심과 서원…그 엄청난 차이

-월호스님-

욕심과 서원은 다른 것입니다.

욕심은 나만을 위한 것이고,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고, 서원은 우리 모두를 위한 윈-윈 전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서원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죠.

엄청난 에너지가 생깁니다.

서원을 세우게 되면은 그 세우는 순간부터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게 돼요.

왜냐? 동일한 주파수를 맞춰놓은 게 되니까.

그 다음에 욕심은 본능적이지만, 서원은 능동적으로 내야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이생기심을 해야 돼요.

본래 우리 마음속에는 그렇게 남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이 없죠.

대부분 본능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뭔가 내 가족을 위해서, 잘 먹고, 잘 살려는 그런 마음이 본능에 꽉 들어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마음을 일으켜야 돼요.

그것이 바로 이생기심입니다.

그 마음을 발생시켜라.

만들어 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능동적으로.

그래서 욕심은 본능적이지만, 서원은 능동적인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서원은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안다는 거죠.

일체중생을 언제 제도하겠습니까? 끝나는 날이 어디 있어요? 계~속 그 과정, 과정 자체를 즐겨야 그게 즐거운 것이지, 결과만을 놓고 즐거워 할려다보면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즐거워할 날이 며칠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그날 바로 지금 여기서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푸는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아, 이것이야말로 부처의 행을 사는 것이구나.’ 수행불행.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다보면은 행불을 하다보면 성불이 오는 것이지,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아무리 인사를 해도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행불을 안 하면은 성불은 요원한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꿈같은 얘기가 되는 것이죠.

성불은 행불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 같은 행을 우리가 연습할 때, 차츰차츰 그것이 구체화 돼서 나중에는 무심결에 할 수 있게 되죠.

처음부터 무심결에 할려고 그러는 건 욕심입니다.

대단한 욕심이예요.

처음부터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준다든가 받는다는 생각 없이 되겠습니까? 안 되니까, 될 때까~지 한다는 겁니다.

될 때까지.

그게 되면은 그때는 무아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사실은 더 이상 안 해 될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죠.

처음에는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준다든가 받는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걸 주고, 너희는 나에게 받고, 이런 생각이 당연히 일어나죠.

상을 세우고 싶죠.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TV든, 라디오든 막 나발을 불고 싶죠.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도 받고, 명예도 드날리고 싶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쉴 때까지, 그래서 무심하게,좋은 일도 역시 무심하게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연습을 해야 되는 겁니다.

유주상보시를 연습 안하고 무주상보시를 한다.

이것은 마치 축구선수가 볼을 차는 연습을 하지도 않고 운동장에 나가자마자 멋진 슈팅을 날리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욕심입니다.

볼을 차는 연습을 수~없이 해서 마침내 무심히 차도 골대 안으로 아주 완벽하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돼야 그때 인제 무심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무심하게 볼을 차는데 그냥 쑥쑥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그래서 유주상보시를 연습을 해서 무주상보시에 이르면은 그것이 바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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