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유한 본질을 표현할 의무
-법상스님-
다음은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은 변했다’의 한 부분입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만난 모든 이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게 언제나 내 고유한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되려는 노력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나 자신을 앗아가기만 했다.
그럴수록 다른 이들이 내 진정한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뿐이었고,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만들 뿐이었다.
진정한 내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또한 내가 여기에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 자체에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본질, 나다운, 자기다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즉,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뭔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딴 사람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은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의 삶이 더 멋있어 보이고, 저 사람이 가진 돈이 부럽고, 저 사람의 외모가 부럽고, 저 사람의 능력이 부럽고, 저 사람 아들은 시험도 잘 보고, 학교도 좋은 데 갔고, 남의 남편은 돈도 잘 벌어 오는데, 진급도 잘하고 하는데 내 남편은 왜 이런가하면서 남들과 비교하곤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내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과 나의 삶을 비교하고, 어떤 비교 우월감에 때로는 우쭐하다가 또 비교 열등감에 때로는 기분이 축 쳐지기도 하고 이런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산단 말이에요.
즉, 나 자신이라는 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지 못해서 안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여기서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본연의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써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전혀 기웃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허용하면서, 지금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면서 사는 것이지요.
설사 내가 온갖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다운 삶에서 나만이, 이 우주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많은 인구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나만이 겪을 수 있는 그 경험을 통해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이 우주법계 전체와 공유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내가 우주법계의 하나이면서 전체인,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인 그러한 방식으로 내가 이 우주법계 전체에 도움을 주는 방식이고, 공헌한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방식으로 살 때만이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우주법계에 기여할 수 있고, 자기부처를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