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나를 사랑하는 방법

나를 사랑하는 방법

-법상스님-

‘무아’라고 그럽니다.

‘나’ 라고 하지 않고 ‘나 아님’ 이라고 말합니다.

‘나’ 는 ‘나 아닌 것’ 의 모임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나’ 인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전히 ‘나 아니 것’ 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나’ 속에는 아침에 먹었던 밥이며, 반찬들, 물이 있고, 또 그 이전에 먹어왔던 숱한 음식들이 있으며, 오전에 쬐었던 햇빛 또한 들어 있습니다.

내 생각 속에는, 숱한 사람들의, 부모님이며 선생님을 비롯한 온갖 사상가들의 이념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고,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 또 그 위의 숱한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나’는 온전히 ‘나 아닌 것’ 들의 모임입니다.

아무리 ‘나’ 를 찾아보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이 ‘나’ 입니다.

‘나’ 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나’ 만을 사랑합니다.

나를 가꾸고, 나에게 양분을 주고, 나의 소유며, 나의 관념을 늘려 나가기에 바쁩니다.

나무 가지에 물을 주면 당장에는 윤기가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뿌리에 물을 주는 것만큼 근원적이지는 못합니다.

가지는 뿌리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 는 ‘나 아닌 것’ 들에 근원을 두고 있기 떄문에 나를 위해 양분을 주는 것보다 ‘나 아닌 것’ 에 양분을 주는 쪽이 더 근원적입니다.

좀 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길입니다.

‘나’ 를 사랑하는 만큼 ‘나 아닌 것’ 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나’ 를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나 아닌 것’ 이 바로 ‘나’ 이기 때문입니다.

그 둘이 둘이 아니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나’ 와 ‘나 아닌 것’ 이 둘이 아니게 된다는 것, 그것은 ‘나’ 와 ‘일체’ 가 둘이 아님을 아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입니다.

‘나’ 를 가꾸려 하고, ‘나’ 의 소유를 늘리려 하고, 내 생각만을 고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실은 ‘나’ 를 죽이는 길이며 ‘나 아닌 나’ 를 모르는 어리석은 행입니다.

‘나 아닌 것’ 을 사랑하세요.

나 아닌 일체 모든 것이 바로 ‘나’ 입니다.

안과 밖은 서로 통하게 되는 법이고, 나아가 그 둘은 사실 하나인 것입니다.

부모님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친구들을, 동료들을, 도반들이며 이웃들을 온전한 ‘나’ 로서 사랑하고 받아들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온전한 사랑을 베풀 때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기적 같은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설령 내가 미워하고 있던 대상이라도 그 또한 나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우린 나를 바라보면서 100%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아주 미워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이 혹은 입술이 예쁘지 않다고 눈과 입술을 미워하여 혹사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 또한 ‘나’ 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라도 그것은 ‘나 아닌 것’ , 다시 말해 ‘나’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세상 그 어떤이라도 나를 쉽게 인정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작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라도 그것은 나와 똑같은 비중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아귀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위해 허벅지를 떼어낸 부처님의 일화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둘기 무게만큼의 허벅지 살을 떼어내도 평행을 이루지 않던 저울은 부처님께서 온 몸을 내던지고서야 평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부처님의 몸과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한여름 밤에 나를 괴롭히는 파리나 모기, 들녘의 풀벌레며 작은 개미, 여치들에서부터 개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작은 조약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 하나는 ‘나 아닌 것’ 으로써 ‘나’ 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나’ 를 사랑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를 사랑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나 아닌 것’ 들을 사랑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이기심’ 이라 불리며 업을 짓는 일이고 아상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에 수행자에게는 별로 추천해 줄 만한 방법이 못 됩니다.

그러나 ‘이타심’ 이라 불리는 후자는 복을 짓는 일이며 아상을 녹이는 일이기 때문에 나아가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소중한 길이 됩니다.

‘나 아니 것’ 들을 사랑하는 일은 ‘나’ 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나’ 의 행복은 ‘나 아닌 것’ 들의 행복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주위에 시선을 돌려 베풀고 사랑하고 아껴줄 일입니다.

‘나 아닌 것’ 들을 위해 베풀고 사랑하고 아껴줄 때 우리는 ‘나 아닌 것’ 들에 의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경이로운 사랑을 받게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미소지을 때 세상은 나를 향해 웃음 짓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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