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그냥 살자
-법륜스님-
저렇게밖에 될 수가 없는 것인지 하나가 살기 위해 하나가 죽는 그 길밖에 없는 것인지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젊지만 늙을 수밖에 없고 그의 왕국도 결국은 망해서 학살당할 수밖에 없는 그 길이 눈에 훤히 보였다.
부처님이 계실 당시 인도는 삼백여 개의 나라가 십여 개의 나라로 통합되는 혼란기에 있었다.
그 속에서 그분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인생은 왜 이렇게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못 입어서 못 먹어서 더 높아지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그 때 그 먹는 것과 입는 것, 사는 것이나 지위, 가족에 대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깊이 삶을 살펴보았다.
그런 속에서 그분은 인생의 괴로움과 속박들, 인간의 갈등이 어디서 오는지를 보셨다.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는 행복과 자유가 어떻게 도래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셨고 그런 길을 사셨다.
혼자 그렇게 사신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인생의 길을 제시했고 그 길을 따른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같이 누렸다.
부유한 장자나 왕이나 브라만 출신뿐만 아니라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와 창녀, 천민까지도 이 새로운 삶에 동참했다.
그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든 이제까지 어떤 짓을 하고 살았든 어떤 환경에 처해졌든 상관없이,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그 꿈에서 깨어나면 한갓 꿈에 불과한 것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그런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들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귀의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불법에 귀의하고 삼보에 귀의했느냐? 삼보에 귀의했는데 어떻게 인생이 괴로울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삼보에 귀의하고 생각으로만 삼보에 귀의했지 실제로는 귀의하지 않았다.
첫째 우리는 돈에 귀의하고 산다.
그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돈만 있으면 대통령도 되고 아름다운 여자 잘 생긴 남자도 구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재미있는 세상 구경을 다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으면 자식한테도 괄시받고 무시당하고 세상의 쾌락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찾아와서는 이혼해야겠다고 같이 못살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남자가 돈을 못 벌고, 여자가 돈을 막 쓴다는 것이다.
이혼 이유가 결국 돈이다.
아들 걱정하는 한 어머니가 찾아왔기에 물어보면 아들이 돈을 못 번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께도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한다.
둘째는 출세에 귀의하고 세 번째는 인기 네 번째는 건강에 귀의했다.
우리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삼보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부처님의 삶을 닮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서 거기 도달하려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수많은 선지식들을 스승으로 삼는 인생의 길을 가야 삼보에 귀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부처님이 팔만사천 대장경을 통해 많은 말씀을 하신 것 같지만 간추려 보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으라는 것이다.
인생의 방향을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잡았으면 그 방향으로 가야 된다.
어떻게 가야 되느냐?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열심히 하면 금방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십 년을 닦았는데 안 된다고 하는가.
다른 데 귀의해서 그렇다.
방향이 제대로 잡혀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방향을 잘 잡는다 해도 안 가고 가만 서 있으면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죽어라고 가도 방향이 잘못 잡히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런데도 안 된다면 안 되는 게 이상하다.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맨날 죽이려는 마음 내지 말고 살아 있는 생명을 아끼고, 남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남을 속이지 말고,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을 쾌락으로 삼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 주고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자기 인생이 괴로워지겠는가? 하루에 한 시간을 내어 자기 일과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조용히 호흡을 관하면 삶이라는 게 굉장한 것 같지만 들어간 숨이 나오지 않아도 끝나고 나온 숨이 들어가지 않아도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숨쉬는 거기에 달려 있는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는다면 이렇게 사는 데 무슨 그렇게 큰 괴로움이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어떤 삶 속에서도 기쁨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릇이 되어 있는 것은 돈에 대한 귀의이다.
이것 하면 뭘 주는데? 왜 내가 이런 일 하는데 돈을 안 주느냐? 돈 안 주면 칭찬이라도 해 주고 높이 받들어라도 주어야지.
그런 생각 때문에 세상에서도 괴롭고 절에 들어와서도 괴롭다.
그러나 생각 한 번 바꾸면 다른 사람한테도 좋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니 나도 재미있고 좋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리석음에 빠지고 업력에 끄달리고, 경계에 끄달려 순간순간 화내고 짜증을 내며 미워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아직 우리가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못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붙들고 몇 시간 며칠 몇 달을 간다는 건 문제이다.
붙들고 있다는 건 그것을 놓기 싫다는 거다.
자기의 실수를 통해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 그런 삶을 찾을 수가 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자기 삶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거름이 된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 거름이 되어서 그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 나무가 그 잎을 만들고 그 잎이 떨어져서 다시 그 나무의 거름이 되듯이 자신의 지난 삶이 자신을 성숙시킨다.
어디 딴 데 가서 거름을 가지고 나무 밑에 넣지 않더라도 나무가 잘 자라듯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성숙시킬 수 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나무 뿌리를 다 파헤쳐 놓는 것과 같다.
열심히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책 저 책,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서 도를 구한다고 돌아다니는데 결국 신발만 닳는다.
마음이 헐떡거려서 돌아다니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도 방황이다.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인연을 따라 그냥 다니면 천하를 돌아다녀도 늘 그 자리에 있다.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보고 “사문아, 게 섰거라!” 했을 때 부처님은 못 들었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가셨다.
그러자 화가 나서 쫓아온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목에다 칼을 대고 “야, 왜 서라는데 안 서! 왜 안 멈추는 거야!” 하고 소리쳤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멈춘 지 오래 됐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부처님은 걸으시면서도 한결같으셨다.
앞에 왕이 나타나서 공경을 해도, 살인자가 칼을 들고 죽인다 위협해도 여일(如一)하셨다.
다만 인연 따라 제도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오느니 가느니 앉느니 눕느니 하면 여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거다.
여러분들이 인연 따라 이 남자와 살라면 살고 저 남자와 살라면 살고.
이 아이 돌볼 인연이 되면 이 아이 돌보고, 저 아이 돌볼 인연이 되면 저 아이 돌보고, 저 절에 살 인연이 되면 저 절에 살고 이렇게 살면 누가 뭐라 해도 그건 여일한 삶이다.
인연 따라 올 뿐이지 끄달려 다니는 게 아니다.
사실 여일하다면 결혼을 열 번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냐.
몸은 한 곳에 두고 한 남자 한 여자를 잡고 있어도 늘 방황하고 있어서 무수한 남자를 찾아다니고 무수한 여자를 찾아다닌다.
한 곳에 가만 못 있어서 가슴이 답답하여 산에 올라가 고함지르거나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리 저리 뛴다.
요즘은 한국 안에서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배낭 매고 세계를 돌아다닌다.
수행은 자기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데 있다.
잘 살펴보면 온갖 것이 다 거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갖 길이 다 그 속에 있다.
또한 가까이 있는 우리 이웃 도반들을 돌아보면 거기 배울 것이 많다.
꼭 법당 가서 스님 법문을 들어야만 배우는 게 아니라 부엌에서 같이 일하는 옆 사람을 보고도 배우는 게 있다.
그 사람이 내게 잘한다 싶으면 잘하는 대로 본 받을 게 있고 못 한다 싶으면 못하는 대로 배울 게 있다.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그것 참 어리석다는 걸 알 수 있고, 꼭 내 마음에 들고 좋은 것만 배우는 게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공부해 간다면 어찌 인생이 괴롭다 하겠느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위암에 걸려 위를 잘라낸 사람, 밥 못 먹고 죽만 먹는 사람, 죽도 못 먹고 링겔만 꽂고 있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라.
이가 없어 오징어를 씹을 수 없는 사람에 비하면 이가 있어 오징어 씹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행복한 거다.
비록 안경을 껴도 새파랗고 빨갛고 한 것이 보이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행복한 사람이다.
욕하는 소리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이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다리가 있어 산에 올라가고 나무를 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중풍에 걸려 가지고 반신불수가 되어 있는 사람에겐 손만 제대로 움직여도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자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여러 행복감이 있는데 왜 늘 이것을 외면하고 사는가.
몸만 성해도 행복하고 또 비록 병이 나도 그런대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 사람이 장가가는 그날 결혼식장에는 안 가고 학교 공사판에 나오듯이 그렇게 차려입고 학교에 왔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장가 가는 날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장가가는 날이 맞는데 집에 물이 없어서 학교에 세수하러 왔다는 거다.
옷도 없어서 노동복 그대로 입고 갈 생각이어서 양복과 속옷, 양말, 신발, 혁대, 와이샤츠까지 몽땅 빌려 준 일이 있다.
그렇게도 사는데 이 풍부한 한국에서 뭐 때문에 못 살겠는가? 수행이란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깨닫고 보면 인생이란 길가에 있는 풀이나 소나무와 같은 거다.
그렇게 태어났다가 죽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에 제자들에게 백골관을 하라고 하셨다.
시체를 보면서 이치를 분명히 통찰하게 한 것이다.
그러자 인생이 굉장한 줄 알다가 별것 아니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호흡관을 하도록 하셨다.
살아 있는 목숨을 끊는 것도 인생이 별것 아니라고 좌절하는 것도 다 인생이 특별한 거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목매어 죽으려 해도 힘들고 이미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려고 발버둥치고 용쓰는 것도 힘든 일이다.
죽을 때가 되어 죽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 없고 죽을 때가 안되어 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
그냥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