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본마음과 분별심

본마음과 분별심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

월호스님

‘참 나’로서의 본 마음은 불생불멸

거짓 마음에 불과한 분별심은 윤회의 주체이자 생멸의 원인

마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참마음이요, 둘째는 거짓 마음이다.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상시에 나다, 남이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고 구분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이것은 모두가 거짓 마음에 불과하다.

본래 나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참 마음인 줄 안다.

거짓 마음은 할 줄 아는 게 딱 한가지이다.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가르고 이익과 손해를 가르며 나와 남을 가르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별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능엄경〉에서는 이러한 거짓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다.

도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도적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과 밖, 중간 그 어디에도 이 마음은 없었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마음의 소재를 찾을 수가 없었을까? 그 이유는 마음에 고정된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답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은 마치 허깨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꿈이, 물거품이, 그림자가, 이슬이, 번갯불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거짓 마음인 분별심은 인연 따라 느닷없이 생겼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까닭에 정해진 처소가 있을 수 없다.

존재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이 허망한 마음을 고집하여 ‘나’로 삼는 까닭에 윤회가 거듭 된다.

인과를 주고받고, 받고 주면서 끊임없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는 것이다.

결국 이 허망한 분별심이야말로 윤회의 주체이며, 생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다 하지만, 사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닦을 수는 없는 법이다.

허공을 닦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마음은 다만 쉬어줄 수 있을 뿐이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분별심을 쉬어주는 것, 이야말로 참다운 마음공부이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歇卽菩提)’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별심을 쉬면, 본마음이 드러난다.

파도가 쉬면 본래의 물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래의 맑고 평평한 바다에는 온갖 모습이 있는 그대로 찍힌다.

파란 하늘은 파랗게, 하얀 구름은 하얗게, 둥근 것은 둥글게, 모난 것은 모나게,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각자 나름대로의 분별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색안경을 벗어던지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본마음은 변화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려서 섬진강을 바라보던 성품이나, 나이가 들어서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몸은 쭈그러져 늙었을지언정,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 그 자체는 결코 쭈그러들거나 늙지 않았다.

또한 좌우를 돌아본다고 하자.

그럴 때 얼굴이나 눈은 돌아볼지언정, 보는 성품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다.듣는 성품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종소리를 듣는다 하자.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생겨났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종소리와 함께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종소리는 생멸이 있지만, 종소리를 듣는 성품에는 생멸이 없다.

나아가 몸은 잠이 들어도 이 성품은 잠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꿈에서도 보고 듣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듣는 성품이나 보는 성품이나 모두 한 가지로 본마음이다.

이러한 ‘본마음 참 나’로서의 성품은 불생불멸이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항상 하며, 즐겁고, 불성인 ‘나’가 있으며, 청정하다.

(常樂我淨)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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