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괴로움을 없애려 애쓰지 마라

괴로움을 없애려 애쓰지 마라

-법상스님-

살면서 괴로움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한번쯤 가슴 미어지는 고통을 겪어 봤을 것이고,

또한 가슴 속에 파묻고 살고 있으리라.

지난 주에도 법회를 하는데 어떤 한 대목에서

한 사람이 유난하게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꼈다.

때때로 이런 사람들은 그 아픔을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파묻고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아무리 놓으라고 비우라고 해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놓아야 하고 맑게 비워야 텅 빈 가슴으로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로 놓고 비울 수 있는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번뇌며 욕심이며 집착을

놓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왔다.

그러나 놓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도 놓아야 할 번뇌일 뿐, 깨닫고자 애쓰고

놓아버리고자 애쓴다는 것은 또다른 분리를 가져올 뿐이다.

그러면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가 괴롭다고 느끼는

주체인 ‘나’ 자신과, 괴로움이란 대상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야야 한다.

이 세상이며 괴로움, 또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오직 인연의 탓이다.

실체적인 어떤 것이 고정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

고통도 아픔도 업(業)도 다 본성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자신 스스로 지은 선악의 행위에 의해 잠시 신기루처럼

만들어졌을 뿐이다.

인연따라 온갖 사물이 생기고 인연따라

온갖 사물이 없어진다.

내 행위에 따라 온갖 사물도,

이 세상도, 고통도 만들어지고, 내 행위에 따라 그 모든 것이 소멸된다.

인연따라 만들어 진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실체 아닌 것에 얽매일 것은 없다.

실체 아닌 것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답답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연따라 만들어졌기에 세상 모든 것은 다 공(空)하다.

물질도 공하고, 사람도 공하고, 괴로움도 공하며,

아픔도 슬픔도 공하다.

사랑도 미움도 공하며,

수행도 열반도 부처며 깨달음도 다 텅 비어 공하다.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이 다만 내가 지은 선악의 행위인 업에 의해

잠시 꿈처럼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마치 사막의 여행자에게 갈증으로 인해 꿈처럼 오아시스가 보이듯,

이 세상으로 여행 온 우리들에게 갈애(渴愛)로 인해

이 세상 온갖 존재라는 오아시스가 보이는 것뿐이다.

그것은 오아시스일 뿐.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 얽매일 것도 없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아픔도 슬픔도 그냥 우리가 지어낸 것에 불과할 뿐이니

이 세상의 본연에는 털끝 하나 움직인 일도 없고, 일어난 것도 없다.

그러니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를 꿈꿀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본래 자리에 늘 그렇게 여여(如如)하게 놓여있을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일체 모든 관념의 울타리를 놓아버리고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

일체를 다 놓는다는 것은 애써서 할 일이 아니다.

애쓰고 노력하면 벌써 어긋난다.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일이며, 그랬을 때 지금 이 순간의 온전한 성품을

놓치고 만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 안의 분별을 그냥 내려놓고,

내 안에 켜켜이 쌓인 관념의 틀을 그냥 버리기만 하라.

내려놓으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붙잡으려고 애쓰는 일만 버리면 된다.

참마음을 찾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본래 환한 참마음을

그냥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억지스레 분별해 놓고 다시 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억지스러운 마음만 놓아버리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본래 자리를 찾는다.

여여하게 물 흐르듯 흘러간다.

아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그것이 우리들의 본성이고,

이 세상의 본래 성품이다.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찾되 찾으려는 노력 없이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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