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고통에서 벗어나려면___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법륜스님-

한 마을 촌장이 부처님을 찾아와 하소연을 합니다.

“저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난폭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누구는 유순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을 유순한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을 난폭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속에 탐욕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게 되지요.

노여움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증오심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 이런 사람을 난폭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탐욕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유순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있는 사람이 난폭한 사람이고 없는 사람이 유순한 사람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지요? 욕심이 많은 사람, 분노가 있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마치 눈이 어두운 사람이 길에서 헤매는 것처럼 인생의 길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요.

이것을 경전에서는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고기는 살려고 낚싯밥을 문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죽게 되지요.

쥐가 쥐약을 먹는 것도 그렇고요.

쥐가 쥐약을 먹고 괴로워 몸부림 치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왜 쥐약을 먹게 되었을까?’ 첫째는 ‘내가 하느님을 안 믿었더니 하느님이 나를 벌하는구나.’ 둘째는 ‘내가 사주팔자를 잘못 타고 났구나.’ 셋째는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과보를 받는구나.’ 넷째는 ‘그것이 쥐약인 줄 몰랐구나.’ 어느쪽이 진실입니까? 전생에 죄가 많아서 쥐가 쥐약을 먹었나요? 하느님한테 벌 받아서 쥐약을 먹었나요?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나빠서 쥐약을 먹었나요? 아닙니다.

쥐약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먹은 거지요.

무지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고(苦)의 근원을 무지입니다.

한 부부가 갈등을 겪다가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는 상황에 이르렀어요.

왜 그럴까요? 전생에 철천지 원수라서? 궁합이 맞지 않아서? 신의 노여움을 사서? 아니에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어리석어서 그런 것니다.

사주팔자가 나빠서 그렇거나 전생 때문에 그렇거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런 거라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라면 깨치면 돼요.

그래서 수행은 사주팔자를 고치는 것이고, 전생을 좋게 바꾸는 것이고, 신의 축복을 받는 길로 나아가는 거예요.

고통은 바로 탐진치 삼독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결과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살아가면서 그것은 가만 둔 채 하늘을 원망하고 사주팔자를 원망한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 십대 발원문 중 첫 번째가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곧 “부처님이시여, 저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라고 하는 이 삼악도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고 싶습니다’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지요.

그러면 어떻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로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 삼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 십대 발원문의 두 번째가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입니다.

탐진치 삼독을 소멸시키기 바란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탐진치 삼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까? 바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수행자들의 모임인 공동체 승가에 귀의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이라고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길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수행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저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 천상에 보내준다 하더라도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 왜 그렇습니까?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야 해탈할 수 있고,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천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윤회의 고통 안에 있는 것이고 해탈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천상에 가느냐에만 관심이 있지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며,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보다는 즐겁게 해주며, 거짓말이나 욕설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자비롭게 말해야 천상에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상에 날 인연은 짓지 않고 천상에 나기만을 바라니, 그것은 쥐가 쥐약을 먹는 것이나 똑같은 겁니다.

결국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죠.

천상에 가고 싶은데 지옥에 떨어지니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데 보살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천상에 갈 복을 지었으나 “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괴로워하니 내가 그 고통을 대신 받고 저 중생들을 좀 편하게 해주어 되겠다” 이렇게 원을 세웁니다.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지옥에 끌려간 게 아니고,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갑니다.

중생은 이 세상에 자신이 지은 인연의 과보로써 오니까 중생이고, 보살은 이 세상에 중생을 구제하러 자발적으로 오기 때문에 보살이에요.

보살은 인생의 주체가 자신이고, 중생은 업이 주인이 되어 업에 끌려다니는 속박된 사람이죠.

보살은 베푸는 자이고, 중생은 얻려고 하는 자예요.

중생은 베푼 것은 없이 그저 공짜만 바랍니다.

남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이해받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니 늘 고통 속에 삽니다.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 무지 때문입니다.

이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에 의지하고 현실 속에서는 스승을 믿고 따르며 도반들과 더불어 정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불법승 삼보에 의지한 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진해야 할까요?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곧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고 어리석음을 깨쳐 지혜를 증득하게 될 때, 비로서 해탈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수행자는 이렇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아야 합니다.

예불을 드릴 때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데 계행을 청정히 지키는 향기로 공양을 올린다고 해서 계향(戒香)이라고 합니다.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공양을 올린다는 거지요.

정향(定香)이란 내 고요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린다는 말이고, 혜향(慧香)이란 일체 무지를 깨뜨린,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말입니다.

이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는 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하늘의 신들은 때가 아닌데도 사라수(沙羅樹)꽃을 피워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하늘의 꽃비를 내려서 공양을 올렸으며, 풍악을 울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요.

정말 굉장한 공양이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어요.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한다는 게 뭡니까?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나갈때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나느냐? 아닙니다.

다시 이 세상에 와서 티끌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중생들의 처지에 맞게 갖가지 방편으로 교화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거죠.

부처님께서 이것을 몸소 보여주셨잖습니까? 출가 정진하여 마침내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 45년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온갖 방편과 비유로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셨지요.

촌장이 부처님을 찾아온 건 수행을 하겠다고 온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으러 온 것지요.

돈도 있고 지이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니까 좋은 평판까지도 얻고 싶었던 거지요.

한마디로 명예를 얻고 싶은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건 도가 아니니 그런 걸 물으려거든 집에 가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도 더 놓은 경지로 인도하셨지요.

부처님께서는 난폭한 자는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지옥고에 떨어지는 사람이고, 유순한 자는 돌이켜서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해탈 열반하는 사람이라고 차원을 달리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해탈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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