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100일 기도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

●100일 기도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

-법상스님-

우리 절엔 한 1년 쯤 전부터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3 수험생들이 셋 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힘들고 답답할 때면 점심시간이고, 하교 길이고, 쉬는 날이고 할 것 없이

절을 찾는다.

그저 조용한 절이 좋아 찾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얼마 전 부터는 새벽기도에도 곧잘 나오고, 평소에도 절에 와서 108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1080배도 하고 나름대로 부처님 전에 앉아 원願을 세우고

기도도 하곤 한다.

그래도 이 곳 시골은 이 정도로 수험 시즌이 정갈하고 차분하니 참 좋다.

이 아이들 부모님 또한 고3 수험생을 둔 부로로써 내심 걱정이 안 되겠느냐마는 도시 부모님들처럼 그렇게 유난을 떨지는 않아 보인다.

이 맘 때면 전국의 산사가 기도객들로 분주하다.

입시기도며 진급기도 등으로 수많은 기도객들이 정성스럽게 불전으로 나아가 향을 사르고 절을 하곤 한다.

어디 산사뿐이겠는가.

교회고 성당 또한 마찬가지다.

매년 반복되는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도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새삼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말 그대로 ‘비는 것’이다.

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원하는 바가 크고 강할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그러나 다른 말로 기도가 간절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게 바란다는 말이며 그 이면에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 또한 크게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연 기도의 의미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데

있을까.

그렇지 않다.

수행자의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고자 함이 아니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 결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내적인 수행력을 쌓는데 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이 비워지면 결과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그랬을 때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기도의 참 의미가 아닐까.

기도를 하면서, 수행을 하면서 ‘목표를 반드시 이루기를’ 바라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그건 벌써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와 수행은 아무런 이유가 붙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조건이나 거래의 마음이 붙어서도 안 된다.

수행하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히 이룬 순간인 것이지, 기도를 했더니 이렇게 되더라거나, 기도를 했는데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거나 그런 분별이 붙는다면 그것은 부처님과 하느님과 거래를 하자는 것이지 참된 기도가 아니다.

만약 기도만 하면 무조건 다 이룰 수 있고, 기도 안 하면 떨어뜨리는 그런 신이 그런 부처가 있다면 당장에 그런 종교를 버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만약 기도만 하면 붙여주는 신이 있다면 기도는 안 했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내가 며칠 동안 기도할 테니까 꼭 진급하게 해 주시고, 일 잘 풀리게 해 주시고, 대입 합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부처님과 하느님과 장사를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다 붙인다면 거기에 무슨 공덕이 있을 것인가.

입시기도든, 진급기도든 그 기도의 목적은 합격이나 진급에 있지 않다.

다만 입시와 진급이라는 그 결과 앞에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롭고 당당한 내 안의 중심을 잡는데 있다.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 결과를 당당하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공부를 하는데 기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참되게 기도하고 정진한 수행자라면, 인과를 믿고 신의 섭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내 스스로 공부한 만큼, 노력한 만큼 온당한 결과를 받는 것이 당당한 노릇 아니겠나.

언젠가 100일 기도 끝에 진급발표가 있은 뒤, 내가 아는 신도님 중에도 몇 분께서 진급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직장인들에게 있어 진급의 문제는 가족 전체의 생계가 달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특히 진급이 안 되면 바로 퇴사해야 하는 곳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분들이 마음을 비우고 정리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아픔에 오래 머물지 않고 훌훌 털어 버리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과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고 내 안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그 진지하고도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대한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었다.

‘저럴 수도 있구나.’ 그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좋지 않은 결과를 놓고 수많은 불편한 반응들을 보아왔던 터라 이 분들의 의연한 반응은 많은 신도님들께 수행자의 바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바른 본보기로 다가왔을 터다.

평소 그 분들의 모습과 기도 속에서 충분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상 현실에 와서 마음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평상심을 잃지 않는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비우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기 위한 기도, 그 기도는 결과와 상관없이 마음에 우뚝 선 중심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어떤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저 사람은 그 어떤 괴로운 일이 있어도 자기 중심을 놓치지 않을 사람이다 하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사업에 실패를 하든, 진급에 실패를 하든, 그 어떤 인생의 아픔 속에서도 잠시 주춤거릴 지언정 금새 툭툭 털고 일어날 사람이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 믿음의, 그 힘의 원천은 바로 ‘비움’에 있다.

언제라도 비우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에 있다.

‘저 사람은 뭐든지 잘 해낼거야’라는 믿음이 아니라, 저 사람은 언제라도 그 길이 아니다 싶을 때 그 마음을 비우고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란 그 믿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나고, 경제력도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성공만을 바라며,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믿음을 쉬 발견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사람은 누구든 비워야 할 날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승승장구하며 오르기만 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떨어질 날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성공에서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성공을 비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때 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직 마음을 비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도가 필요할 때는 마땅히 기도를 할 일이다.

다만 합격이나 진급을, 어떤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 어떤 결과 앞에서라도 내 안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당당해 질 수 있도록, 조급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을 맑게 비울 수 있도록, 비움의 기도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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