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보신 바 진실 생명 –
광덕스님
부처님의 최초 설법 양태는 범부들이 보고 있는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아주는 것 입니다.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이다, 물질이다, 조건이다하는 이런 것들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가 다고, 물질이 다고, 환경이 다고, 거기에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골몰하고 살다가 마침내는 허무를 안고 인생을 떠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세간적인 평가에 대해서 지혜의 눈으로 그것을 분명히 파헤치십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몸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가치라고하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적인 환경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설명하십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든 절대적인 실체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고(苦)를 상반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부처님이 깨달은 바 내용을 설명하는 이 아니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의 눈으로 보신 바 인간의 세계, 범부의 세계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현상적인 것, 이것은 “실로는 무(無)다.” 하고 필경엔 말씀하십니다.
놓아라, 놓으면 태양이 네 가슴에 안긴다 무라고 하는 데서부터 우리가 보는 감각적이며, 현상적이며,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름에 가려서 캄캄한데 헤매고 있다가 구름을 제거해버리면 푸른 하늘이 확 그에게 안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푸른 하늘의 세계를 모르고 ‘무’라고 했다고 무라는 생각을 가슴에 담아 가지고 불교는 무를 가르치는 종교이거니, 허무를 가르치는 종교이거니, 세간을 고(苦)라고 생각해서 비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거니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하는 생각들입니다.
구름이 벗겨지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는 것이며, 태양이 빛나는 것은 그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들은 보지는 않고 생각으로만 꾸며서 알려고 합니다.
무인 줄 알아서 가슴속에 집착을 다 놓아버리면 밝은 하늘이 나타날텐데 놓아버리지 아니하고 무이거니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놓아라, 놓으면 태양이 네 가슴에 안긴다.’ 하고 설명해 줍니다.
이와 같이 해서 현상적인 세계에 부정을 통해서 무(無)니 공(空)이니 하는 생각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무와 공의 실상이 무엇이다 하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여래장경의 법문 말씀입니다.
“태양이 내 생명의 진실이다.
우주에 진실한 존재는 진리밖에 없다.
진리의 강물이 그대의 생명 가운데 흐르고 있느니라.
진리가 넘치고 있는 그 실상이 너의 참 모습이요, 그 외에 네가 보고 있는 것은 허무한 그림자다.
그림자에서 벗어나라.
벗어날 때 진실한 광명이 너의 생명에서 넘친다.” 이렇게 해서 정말 진실한 모습을 우리 생명에서 보도록 다시 설명해 주시는 것이 이 법문입니다.
이 법문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연꽃의 비유로 나와 있습니다.
“연꽃이 피고 잠시 머물다 시들어서 떨어진 자리에 부처님이 앉아서 광명을 놓고 있다.
이 부처님은 연꽃이 핀 다음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연꽃이 피기 전에도 거기 있고, 연꽃이 머무를 때도 거기 있고, 연꽃이 다 시들어서 떨어진 다음에도 거기 있어서 이 부처님은 불멸이다.” 그렇게 설명하시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눈으로 보건대 일체 중생이 모두가 그와 같다.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범부들이 겉으로는 탐·진·치 삼독, 모든 번뇌에 사로잡혀 있지마는 그 속에는 부처님의 지혜와 부처님의 눈과 부처님의 몸이 온전히 갖춰져 있다.
그래서 엄연부동하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의 근본실상 범부가 됐다고 해서 중생이 됐다고 해서 조금도 변질되거나 손상되거나 때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온갖 취(聚)로 돌아다녔다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반야바라밀 여래장, 부처님의 경계, 부처님의 세계가 조금도 때묻지 않고 물들지 아니해서 온전한 덕상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나와 같아서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의 눈으로 보니까, 반야의 눈으로 보니까, 물질과 육체와 감각의 겉껍데기를 투시해 보건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속에는 이와 같은 진실한 모습이 엄연부동하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래장경의 아홉 가지 비유 설명 가운데서 첫째 설명인데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바로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의 근본실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이 무엇이다.
참으로 있는 존재 만유의 근원이 무엇이다.” 하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속박과 한계 가운데서 고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여기서 벗어나서 해탈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이 가르침은 “내가 무엇이다” 하는 인간의 진실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하는 당연히 살아야 할 길을 가르쳐 줍니다.
왜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들은 당위의 법칙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평화는 존중해야 한다, 사회질서를 지켜야 한다, 해야 한다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당위를 말합니다.
당위의 근거가 무엇인가, 왜 존중해야 하는가, 왜 평화를 지켜야 하는가, 왜 서로 질서를 지켜야 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은 없습니다.
그렇게 지키면 가정이 평화롭고, 그렇게 지키면 세상이 평화롭고, 그렇게 지키면 인격이 평화로워진다고 하는 공리적인 타산이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한다에 앞서서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금덩어리인 까닭에 그 금덩어리가 금덩어리의 행세를 하고, 금덩어리의 가치를 누려야 하는 것처럼 내가 부처의 종자, 부처의 신력, 부처의 권위, 부처의 모든 위력을 스스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처답게 살아야할 권리가 아니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의 성격이 그런 것입니다.
‘왜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내용에서부터 ‘진실이 무엇이다’하고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느냐’하는 근본적인 것을 당위에 앞서서 존재에 해명함으로써 그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당위가, 논리의 법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있는 진실상을 해명하는 것이 부처님의 진리입니다.
항상 말합니다마는 우리 불광은 여기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이렇게 완전무결한 부처님의 공덕을 지니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금덩어리인 까닭에 금덩어리답게 고귀하게 살아야 하고, 고귀하게 대접받아야 하고, 고귀한 세상을 꾸며야 하는 것입다.
자기를 분명히 앎으로써 자기가 나아갈 길이 거기서 나타나고, 자기의 참된 진리의 존재를 앎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 사회와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지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 자신, 인간의 생명의 뿌리, 진실한 모습,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바깥에 가치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우상이고 인간은 노예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 가치가 있어서 바깥에 정해 놓고 그 바깥에 정해진 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그러면 인간은 뭐하는 거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라 불법(佛法)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당연히 부정합니다.
절대권위, 절대권능은 인간 자신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성과 인간의 존엄, 절대적인 근거가 이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불광은 이와 같이 해서 모두가 귀하게 살고, 모두가 귀하게 존중받고, 귀한 사회, 귀한 국토, 귀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들입니다.
두 번째는 높은 암벽 바위에 솟아난 나무에 꿀벌이 집 지은 얘기가 비유로나옵니다.
겉으로 봐서는 꿀벌이 와글와글합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 속에는 꿀이 들어 있어서 누구든지 지혜 있는 사람이 벌을 쫓아내고 그 꿀을 따서 자기도 먹고 남도 즐길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벌같이 보이듯이 번뇌망상 삼독심이 부글부글 끓는 범부중생인 듯이 보이지마는 그 속에서는 꿀과 같은 여래장, 즉 부처님의 공덕장 세계가 많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좋은 방법을 써서 벌을 쫓아서 꿀을 따는 것처럼, 번뇌망상을 쉬고 삼독심을 쉬어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라 하는 것이 두 번째 비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은 벌을 그대로 놔두고는 되지 않는 것처럼 역시 우리들 세상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지견, 부처님의 공덕세계를 열려면 마땅히 삼독심을 제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탐심,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생각들, 이러한 삼독심을 먼저 제거하라.
그래서 평화로운 마음, 번뇌가 다한 마음을 닦아서 진실한 자기의 불지견(佛知見)을 열도록 하라” 하는 것이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써 벌을 쫓을 것인가, 어떻게 해서 삼독을 멸할 것인가, 그 대답은 우리 형제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벼 얘기입니다.
벼가 껍데기로 덮여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안은 쌀이지만 겉으로는 겨가 있기 때문에 먹을수가 없지요.
그래서 지혜 없는 사람은 이것을 먹지 못한다고 버리지마는 지혜 있는 사람은 껍데기를 까서 그 음식을 공양하게 됩니다.
역시 이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은 거치른, 즉 범부인 듯이 보여도 그 속에서는 진실한 여래지견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동시에 우리들의 삼독 고뇌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서는 불지견을 쓰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독 번뇌는 버려야 합니다.
방아를 찧지 않고 논에서 거둬들인 벼를 그대로 솥에 넣고 익혀 밥을 했다고 해서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독 번뇌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영원히 빛나는 보물 네 번째는 진금, 즉 금덩어리가 부정한 곳에 떨어진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금덩어리가 똥구덩이에 빠져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똥 구덩이’하고 부정한 것으로만 보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안에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꺼내서 깨끗하게 씻어냅니다.
그리고 친족과 함께 경하스러운 보물을 나누어 씁니다.
금덩어리로 인해 저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친족, 가족이 모두 함께 잘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곳에 진금 덩어리가 떨어져 있듯이, 비록 번뇌망상과 악한 마음과 우리는 본래 부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마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부정한 마음을 가지고 살더라도 그것은 겉으로만 그런 것이고, 그 속에는 진금 덩어리가 있습니다.
진금 덩어리를 꺼내서 물에 씻어 버리면 진금이 여전히 변치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항상 청정한 마음을 가져서 진금인 자신을 빛내야겠다는 것을 배우게 하는 법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가난한 집 안에 숨겨진 보물 금단지입니다.
인도는 옛날부터 보물이 생기면 땅에다 묻어두는 습관이 있었나 봅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어떤 지혜 있는 사람으로부터 조상이 살던 옛 고향 터에 가서 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살면서 밭을 일구다 보니 금단지가 나와서 다시 부자가 됐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또 기수급고독원을 지은 수달다 장자도 그렇게 큰 부자였는데 한때는 가난했었습니다.
홍수가 져서 제방 둑이 무너지는 바람에 땅에 묻혔던 보물단지가 나타났습니다.
몇 대 조상님이 묻어 놓았는 지 모르는 일이지만 수달다 장자는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보물단지가 있지마는 주인이 알지 못하고 또한 아무도 일러주는 사람도 없다면 그 집사람들은 항상 가난하게 기나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생이 윤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절대 자재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혹한 까닭에 오도(五道; 地獄, 餓鬼, 畜生, 人間, 天上)를 윤회합니다.〔아수라(阿修羅)를 포함하면 육도(六道)〕 그렇게 윤회를 하고 있지마는, 그야말로 온갖 고통세계를 빙빙 돌아다니고 살지마는 그 끝없는 방랑생활, 유랑생활, 거지생활을 하고 있는 그 사람도 그 몸 안을 살펴보면 그 몸 안에 큰 보배가 간직되어 있어서 조금도 변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알고 자기 자신에게 갖춰져 있는 보물을 꺼내서 크게 부자로 살고 모든 사람에게 이롭게 해 주는 이것이 다섯 번째 비유입니다.
내 생명 속에 깃든 부처님 광명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에 대해서는 우리 형제들이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뜻을 알아서 “반야는 지혜이고 바라밀은 대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고 성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아시는 분은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이며, 부처님의 광명이며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나에게 충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님 광명인 것을 증득해서 반야바라밀 그 실체, 온 천지에 부처님 광명인 것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이해하는 데는 정말 천층만층인 것입니다.
말만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뜻을 아는 사람, 뜻의 깊이를 아는 사람 내지 말로 하고 있고 뜻으로 그리고 있는 그 이전의 실물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이 실물을 말합니다.
말을 따라가면 불법을 놓쳐버립니다.
뜻만 가지고도 거짓입니다.
그 마음에 그려 받아도 가짜입니다.
마침내는 마음에서 그림까지 떠나서 실물 자체를 얻어야 합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한다면 그런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지혜 완성이 무엇이냐.” 했을 때 “내 생명체 완성된 부처님 진리광명 그 자체를 말하는것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말과 이론으로 말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된 것, 그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불법은 깊다고 하고 어렵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알맹이를 제쳐놓고 겉껍데기, 알아듣기 쉬운 말만 해놓고 이것이 최고야 하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 한번 불면 훅 날아가버리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진실이 못 되는 것입니다.
만인의 원래 모습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고난에 한눈 팔지 말고 반야바라밀, 내 생명 속에 깃든 부처님의 광명을 생각하시라.
나의 생명이 바로 육체 생명이 아니라 육체 생명을 낳게 한 그 이전에 근원적으로 부처님의 진리광명이 있느니라.
부처님의 진리광명, 완전한 은혜의 광명, 이 은혜의 광명이 대위신력으로 당신 생명에 깃들어 있다.
당신 생명의 진실이며 참으로 있는 현실이다.
그 외에는 진실인 듯 보이지만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모습이고 우리 육체로 보는 현상이다.”
반야바라밀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완전무결한 절대적인 진리 자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깥에 있거나 누구의 전용물이거나 기도를 많이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로 너 자신에게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하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이 무엇이냐?” 했을 때 “지혜의 완성이다.”하는 말은 쉬워도 바로 “진리생명이 너에게 넘치고 있는 것이다.”하는 말을 하면 굉장히 어려운가 봅니다.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고 친근하고 독송하고 자기 마음 가운데 항상 머물게 하는 사람은 진리광명이 자기 생명 가운데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만인의 원래 모습인 것을 항상 말하고 있지만 만인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심 염하면 이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구름이 제거되면 태양이 나타나는 것처럼 설명 안 해도 그냥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와 같이 설명 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을 정돈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거듭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무능해 보여도 사실은 부처님께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자기 몸 안에 지니고 있는 부자집 자매들입니다.
정말 행복하게 넉넉하게 남에게 주고 돕고 살 숙명을 타고난 사람입니다.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항상 남에게 널리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