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월호스님-
저 먼 산 정상에서부터 가을 단풍이 물들어 오기 시작 합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단풍을 앞두고 벌써부터 바람에 떨어지는 잎사귀들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단풍을 앞두고 벌써부터 바람에 떨어지는 잎사귀 들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가을은 무상(無常)법을 설해 주고 있으므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산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입니다.
산을 오르면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누가 대신 산을 올라줄 수 있을까?’ 인생이란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대신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신 태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늙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아파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죽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먹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잠자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신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찾아나가다 보면, 실상 나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찮은 심부름이나 대신해 줄 수 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그럼에도 불고하고, 자신의 허물에는 그렇게 관대한 사 람도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실수 하나에는 큰일이라도 나듯 호들갑을 떨며 깎아 내리기에 여념 없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집니다.
마치 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듯이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것입니다.
오로지 나만의 삶, 이 삶을 즐겨보십시오.
어느 날 제자인 신회가 육조 스님께 물었습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육조 스님은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의아히 여겨 되묻자 육조 스님 께서는 답하셨습니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육조 스님의 좌선이란,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허물이 아닌 자신의 허물을 말입니다.
몸은 움직 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신해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알아서 나의 몫에 충실히 하는 것, 그것이 좌선의 시작인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바로 나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