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시다
광덕스님
불자들 사이에서도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믿음의 내용이 이해일진대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당연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깨달음의 내용이며, 깨달은 정도에 따라서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근거한 이해라 하는 것은 스스로 닦고 증득한 경계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는 좀 다르다.
부처님 나시기 전이라면 또 몰라도 부처님 나시어 감로법문이 펼쳐진지 3천년이 되는 오늘의 우리에 있어서는 깨닫고 증득 하기 이전에 부처님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 믿음에 근거해서 닦아가며 자기 변혁을 가져오고 정불국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불자들이 가지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은 수행도 깨달음도 논하기 이전에 이미 확고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기에 혼란이 있어 문제다.
수행과 깨달음을 토대로한 믿음의 형성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믿지 않은 것이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부처님은 깨달음이시고 우리들은 범부다’하는 범부성의 고집이 있다.
그리고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은 부처님의 것으로 돌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의 공허지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의 공허지대, 참으로 중대한 문제다.
믿음이 공허하기 때문에 제각기 자기 소견대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 날 가장 흔하게 나도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부처님은 역사상 인류의 위대한 교사다’라 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부처님은 약 2천 5백년 전에 인도에 나시어 80년쯤 세간에 머무시면서 위대한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행적을 남기신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을 한다.
그에게 있어서 부처님은 이미 가신 고인이고 오늘날에는 그 말씀의 기록과 유적만이 남아 있는 것이된다.
다시 말을 바꾸면 부처님은 과거 역사상의 인물이요, 지금은 죽고 없다는 말이된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불교는 철학이요, 수행론이요, 종교사상이다.
고준한 도덕교훈과 수행이론을 닦아가는 사상체계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는 명백하게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머무는 몸이요,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요, 금강의 몸이요, 법신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기록에 남은 형상의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경전을 배우지 않고 믿지 못하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들이 아직도 우리 불교계에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다.
둘째로 부처님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이해는 ‘부처님은 법이다’라는 이해이다.
저 옛날 바가리비구가 병 들어 몸져 누워 있을 때 그를 찾아오신 부처님께 바가리는 일어서서 예배하고자 하였다.
부처님을 뵈옵고 예배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부처님은 일어나 절하고자 하는 바가리를 말리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몸을 예배해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 부처님은 법이시다라는 말씀은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형상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형상으로 부처님을 삼고자 하는 견해를 강하게 배제하고 있다.
그런데 법이신 부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공적한 경계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체 형상과 한계를 초절한 무상 무주 무한을 관념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우주에 두루한 자연의 법칙처럼 냉엄한 진리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한 물건 설 수 없는 허공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법을 명료하게 깨닫기 이전에 있어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명료해야 하고 확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법이 부처님이라는 이해에는 명료성 확고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의심이 된다.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그리고 명료한 믿음과 이해가 없을 때 우리의 수행생활 창조생활은 허약하고 흐트러지기 쉬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성인 가운데 다시 성인이며, 일체 세간의 아버지 이니라.
이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고, 그 가운데 중생 모두는 나의 자식이라, 나만이 능히 이들을 구호한다.” 이 말씀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법화경]의 말씀이다.
부처님은 법이시로되 단순한 진리이거나 법칙이 아니다.
유무다, 유무를 초월하였다는 등 온갖 희론이 당치 않다.
구태여 말해서 부처님은 법신이시고 무량공덕신 이시고 한량없는 변화신을 나투시는 대지혜 대자비의 몸이시다.
부처님은 명백히 “나는 일체 중생의 아버지”라고 하셨다.
자식에 있어 아버지 보다 더한 의지처가 있을까.
아버지는 무조건의 자비이시고 일체 지혜의 근원이시고 무한 위덕의 근원이시다.
부처님은 우리의 말로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자이시로되 우리에게는 끝까지 자비하신 아버지인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시간 이전에서 이후까지를 사무쳐 보시고 범부 중생들의 성숙을 위하여 무한지혜 무량방편이 쉬날이 없으시다.
자식의 성숙을 위하여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는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 하시기를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서 속히 불신을 성취하게 할 것인가”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부처님은 형상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신 법이시고 또한 끝없이 자비로우신 인격이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끝없이 자비로우신 부처님에 의해서 우리들은 미혹의 밤을 지내고 깨달음의 아침을 만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광덕 불교시론집 [빛의 목소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