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스님─현실(現實)을 바로 보자

현실(現實)을 바로 보자

-보성스님-

사람이 태어나 한 생애를 무탈하게 살고 가기란 매우 힘드는 일이다.

많은 생육기간을 지나 정신적인 자아(自我)를 회복하기도 어려운 일이요, 또 그로부터 추출되는 사명을 얻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명적자아(使命的自我)의 탄생을 본 후에 가서도 그 사명을 구현해감에 있어서 맞게 되는 온갖 상황들, 그런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맞는 모든것은 ‘현실’이라는 어휘 속에 묶여진다.

즉 실제(實際)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현실을 바로본다는 것은 투철한 안목의 마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인생의 뿌리를 찾아야하는 불제자(佛弟子)로서 현실을 바로 본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드는 일이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 줄기차게 도전해나가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현대(現代)와 같은 시대속에서 바른 안목을 지니고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힘이 든다.

사실 한 생명체가 무수한 양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온갖 일을 다하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의 성격이나 소양 또는 힘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어떤일을 성실하게 추진해나가다가 결국 임종에 드는 것이 인간의 생애이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과정에 의의가 있다는 것은 물론 옳은 얘기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과정보다는 목표를 향해 어떻게든 그에 달성하기만을 주력한다.

그러다보면 무리를 하게되고 엉뚱한 환란을 자초하기도 한다.

바로 본다는것은 곧 근본을 보고 지엽을 버리라는 뜻이다.

어떤 일을 추진하든 자기가 선 그자리에서 지엽을 보지말고 근본을 항상 살펴야 한다.

그러나 근본을 항상 살핀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상황을 바로 알아야 한다.

또 오늘이라는 상황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뿌리도 살펴야 한다.

큰 뜻도 지녀야하고 그뜻을 펴기 위해 노력도 해야 한다.

오늘이라는 시대상은 지난 역사 속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드는 온갖요인을 안에 품고 있다.

오늘을 풍미하는 현세주의(現世主義)때문에 영원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눈을 감추고 있다.

물질 기계 과학등 모두가 현세주의의 산물들로 이룩된 오늘이라는 시대속에서는 영원이나 미래 또는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모두 현세주의에 묶여서 살고 있다.

영원이나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富)와 물질(物質)을 축적한다고 해도 영원한 평화는 획득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끝날에는 축적해 나온 부와 물질은 남겨둔 채 죽음의 품에 들어 영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결코 부와 물질의 축적이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생의 모습, 생명의 뿌리를 직시하시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말씀하셨다.

끊임없이, 영원히 진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없다는 말씀을 주신것이다.

그 말씀은 곧 우리가 펴는 삶의 바닥을 정확히 찾으라는 간곡한 부촉인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끊임없이 진행되기는 어렵다는 그말씀은 결국 생명의 본분과 당처를 정확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이것은 곧 현실을 직시하신 표명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진리를 우리는 망각하고서 인생을 설계해서는 안된다.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안다면, 신기루같은 것을 보고 현혹되어 몸부림을 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다 살고 자기가 갈길앞에 서서 흐트러지지 않는 몸가짐을 보인 조사(祖師)들의 넉넉한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평소에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임종에 당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는 모습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의 근원은 결국 자아(自我)의 확대(擴大)와 자아(自我)의 발견(發見)에 맥락을 두고있다.

자아(自我)의 발견(發見)을 덮어둔 삶의 전개는 훗날 자기의 끝인 임종앞에 섰을 때 자연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끝날을 맞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자기 자신과 늘상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진실로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은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보는 것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진실로 본(見)다면 우리의 실천덕목은 보다 정화된 내용의 것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직한 실천덕목을 잡아 자기의 인생을 보다 건전하고 튼튼하게 엮어 모든 이웃들에게 빛을 던질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빛을 지닌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늘어날 때 우리의 현실은 곧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

-[설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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