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불자가 되고자 하면 – 보성 스님 – 사람들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뜻이나 생각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나 뜻이 즐겁고 편안한 것일까요? 미흡하고 불안하고 슬픈 것일까요? 품고 있는 그 생각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은 당연히 즐겁고 편안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럼 지금의 생각이나 뜻이 즐겁고 편안하게 이어져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지난 날의 괴롭던 생각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의 생각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렇게 살리라’하는 결심을 휘어잡으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밝고 바른 생각과 뜻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휘어잡으면 어리석은 생각이나 근심걱정을 떠나게 되고, 근심걱정 등을 여의게 되면 마음이 그야말로 착하고 부드럽고 맑고 밝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사는 바탕이요 힘입니다.
착하고 부드럽고 맑고 밝게 되는 것.
이것이 갈등 없이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착하고 부드러우면 큰 힘이 되지 못할 듯하지만, 착하고 부드럽고 맑고 밝으면 근심걱정에 빠져 들지 않습니다.
만약 근심걱정이나 쓸데없는 생각에 끌려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고 갈팡질팡하다보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생각이 바르고 굳건하면 갈등 없이 나아갈 수 있고, 갈등 없이 나아가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자신감이 충만해집니다.
예를 들어 힘이 장한 운동선수는 시합을 앞에 두면 ‘이걸 수 있을까? 지면 어쩌지?’ 등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길 자신 있다.
내가 이긴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굳건한 생각과 뜻을 품고 흔들림 없이 살게 되면 점차로 공덕이 쌓이고 쌓여 훌륭한 금자탑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내가 지금 좋지 않은 생각이나 나쁜 버릇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스스로를 고치고자 해야 합니다.
가령 내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나는 화가 나쁘다는 것을, 내가 화를 내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화를 내고 나면 후회스럽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를 참기가 힘이 들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그냥 방치하면 점점 더 화 속으로 빠져 들며 그 분노 때문에 마침내는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 백해무익한 화를 잘 다스려 보겠다’ 결심하고, 화가 날 때마다 내가 나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 또 화가 올라오는구나’를 느끼게 되면 능히 화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화라는 것이 원래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다’, ‘싫다’는 것 때문에 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서는 점점 먹구름처럼 치솟아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지만, 화가 일어날 때 일어나는 그 화를 바라보기만 하면 쉽게 그리고 금방 끌 수 있습니다.
마치 산에 담뱃불을 던져 불이 처음 일어날때 발견하면 금방 그리고 쉽게 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그냥 방치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니까? 차츰 그 불길이 억세어지고, 마침내는 나무도 집도 산도 그 속의 생물들도 다 태워버립니다.
모두를 깡그리 태워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불이일어나는구나’를 아는 순간 불을 밟아 끄면 금방 불을 끌 수 있듯이, ‘아, 내 속에서 화가 일어나는구나’ 또는 ‘이 화에게 또 속아서야 되겠는가? 잠깐만 참자’고 하면서 묵묵히 그 화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되면 화는 예상 외로 쉽게 사라지게 됩니다.
화가 날 때 한번 해보십시오.
생각보다 참으로 쉽게 화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이렇게 화가 치미는 것을 곧바로 돌아보는 연습을 자꾸자꾸 하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참으로 평화롭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곧 나쁜 버릇이나 습관에 대해 스스로를 돌이켜보면서 노력하면 틀림없이 바꿀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착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악한 생각들 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이 거칠고 험악한 사람일지라도, ‘이제부터 착한 생각과 바른 뜻을 품고 잘 살겠다’ 작정하고, 자꾸자꾸 나를 돌이켜보면서 꾸준히 노력하게 되면 생각 이상을 빨리 스스로를 착한 쪽으로 바른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착한 사람이 악한 마음을 먹고 나쁜 습관에 빠질 때가 더 문제입니다.
돈 있던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수중에 돈이 떨어지게되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나? 어떻게 살아가지?’하면서 그날부터 낙담을 하고 내리막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왜 수중에 돈이 없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파악하여 원인이 된 그 나쁜 성품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아는 보살이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스님, 큰일 났습니다.
제 남편이 요즘 주식을 한다고 야단입니다.
” “그게 어쩌서 큰일인데?””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요, 돈은 돈대로 잃지요.
“”그래, 많이 잃었나?” “꽤 많이 잃은 모양입니다.
“”하지 말라고 말려 봤더냐?” “물론입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듣습니까? 언제 스님이 불러서 혼내주세요.
” “아내의 말도 듣지 않고 돈 욕심에 푹 빠져 있는데 누구 말을 듣겠나? 나둬라.
홀랑 벗도록 놔둬라.
홀딱벗어러려야 한다.
더 잃을 것이 없어져야 한다.
돈 잃는 것이 걱정은 되겠지만, 무엇 때문에 증권에 손을 대었는지를 모르면 매번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스스로 깨닫도록 놔둬라.
” 우리들 주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증권투자와 손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이 속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나라면 될꺼야’하는 교만심과 ‘손 안 대고 코 풀겠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젖어 있기 때문에 증권에 빠지게 되고 돈을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헛된 욕심인 허욕심과 허구심 때문에 돈을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서 어떻게 진짜를 만들 수 있으며 생산적인 것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에게 “제발 그 헛된 욕심, 허욕심을 버려라.
허구심을 벗어버려라.
“고 하셨습니다.
부처님들은 극락세계와 같은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탐욕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향해, ‘그 괴로움의 불바다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 오라’하고 계십니다.
괴로운 불바다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 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허욕심, 헛된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헛되고 지나친 탐욕만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간단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 헛된 욕심이 눈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과법 및 극락과 지옥이야기 등 갖가지 법문을 설하고 갖가지 처방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주식투자? 투자를 하려면 제대로 된 투자를 하십시오.
‘그저 먹겠다.
손안 대고 풀겠다’는 식의 허욕에 찬 투자를하여서는 안 됩니다.
나의 노력이 깃들고 정성이 깃드는 투자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투자를 하면 반드시 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봄! 겨울에 헐벗은 나무들도 온누리에 봄기운이 뻗치게 되면 생기를 되찾아 움도 틔우고 꽃도 피웁니다.
물고기들도 얼음 밑에 숨어 있다가 물 가운데로 나와 ‘때를 만났다’며 마음대로 춤을 춥니다.
사람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토록 받기 어렵다는 사람의 몸을 받은 지금, ‘나에게도 봄이 왔나’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모든 것이 푸르러지는 봄날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어늘, 혹여나 수백 도가 되는 열에도 녹지 않는 얼음구덩이 속에서 지금껏 차디찬 살덩이를 부여작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부처님의 자비심이 봄기운처럼 찾아들고, 부처님의 태양이 늘 나를 비추어 주고 계시는데, 본래부터 나 주위에 봄기운이 가득 넘치고 있는데, 그 기운을 ‘나’는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온전히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쯤입니까? 실오라기 만큼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결국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그릇’ 만큼입니다.
내 그릇만큼 그 빛을, 자비를,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그릇은 누가 가장 잘 압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릇이 작으면 적게 담길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릇 속이 허욕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공간이 없는데 어떻게 받겠습니까? 그릇이 안 되어 있으면 부처님의 다리를 부여잡고 ‘나 좀 살펴주십시오.
복 좀 주십시오’라며 아무리 동동거려본들 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은 ‘나를 비우고 아미타불의 무량한 빛과 무량한 수명을 가득 담겠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것은 ‘나를 비우고 관세음보살의 대자비심과 복덕을 받들고 따르고 담겠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을 염불하는 것은 ‘나의그릇에 지장보살과 같은 큰 원과 위신력을 담아 보리라’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면 나의 그릇은 커지고, 불보살님을 따르면서 그 공덕을 담게 되면 내 그릇 속이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아들딸입니다.
가장 건전한 마음씨를 갖게끔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 그 분의 제자요, 아들딸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신 어른이니 그 어른을 제대로 따르면 건전한 마음씨를 갖추게 되고 무슨 일이든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업은 물론이요 증권도 잘 되고, 심지어는 기도한 다음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이 더 잘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도둑’ 말이 나온 김에 잠깐 법당을 턴 도둑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이 가끔 있지만, 옛날 어느 절에 도둑이 침범하여 부처님 앞에 놓인 복전함을 털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초가 다 타들어가 불이 가물거려 도둑질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초를 가져다가 불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도둑질하기 좋으라고 불을 밝힌 것이었지만 부처님과 법당 전체를 환하게 만들었으니 자동적으로 촛불 공양을 제대로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도둑은 환한 불속에서 복전함의 돈을 온전히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이 도둑이 마음을 바꾸어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막길을 만났습니다.
잘 될 때는 입이 쩍 벌어지게 조핬는데,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이가 다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신통력이 있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왜 장사가안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당신이 도둑질을 하다가 큰 촛불을 켜서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힌 공덕으로 한 때나마 잘 된 것이라오.
이제부터 받을 것이라고는 도둑질을 한 업보뿐인데 어찌 잘 될 수가 있겠소?” ‘옳다.
바로 그래서였구나.
세상 일은 지은 만큼 주고받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지금부터 열심히 참회하며 복을 쌓아가리라.
‘ 그날부터 도둑은 참회기도와 함게 주위 사람들을 돕고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았고, 얼마 뒤 다시 장사가 잘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과는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비우고 불보살님을 제대로 생각하고 따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에 어떤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을 가지고 있는 선지식입니다.
훌륭한 바탕을 갖추고 있고, 성스러운 힘을 간직하고 있는 선지식입니다.
그래서 육조혜능스님은 찾아오는 모든 이를 향해 선지식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회 때는 “선지식이여, 나의 말을 들어라.
“는 말로시작했습니다.
중생의 종자가 따로 있고 부처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뱅이는 늘 가난하고 부자는 늘 부자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된 부처님의 제자답게 부처님의 아들딸답게 살고자 한다면 세 가지 정도는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 불자는 내 마음부터 맑게 밝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이것만은 꼭 당부 드리고 싶습지다.
저 구름 없는 맑은 하늘을, 티없는 허공을 우러러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저 맑은 허공과 나의 환한 마음이 차이가 없다면 다 된 것입니다.
둘째, 불자는 생각과 뜻이 늘 진실하고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칠지라도 진실하고 안정된 마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과연 어떠한 공부를 하여야 한결같이 진실하고 안정 될 수 있느냐? 바로 정념입니다.
곧은 신념 때문입니다.
늘 곧은 신념을 닦고 바른 신념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 얼씬도 못하는 것입니다.
섯째, 불자는 이웃을 위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몸가 마음을 다 바친 어른입니다.
완전히 다 바치면서도 조그만큼의 보상을 바라거나 바친다는 생각 없이 바쳤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중생인 우리더러 부처님처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허욕심을 부리지 말고, 허욕심 대신 몸과 마음으로 주변 분들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할 줄 알고 남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내 영토가 그만큼 넓어지고 그만큼 부유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나의 창고에 보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남을 위할 줄 아는 행을 닦게 되면 나 스스로는 차츰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가져간다고 하여 나의 창고가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웃이 가져가고 이웃에게 주는 그 이상으로 많은 보배들이 나의 창고에 채워지고 쌓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마음가짐이 선량하고 부드럽고 맑고 밝은 사람은 채우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리혀 주고자 합니다.
주고 돕고 베품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 속을 욕심으로, 허욕심으로 가득 채우게 되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눈앞만 있을 뿐, 다음에 대한 생각이 없어집니다.
내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 오늘 다 내 손아귀에 넣겠다’고 하는 생각뿐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이들이 많은데, 과연 그들의 자손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욕심이 아들딸의 장래를 위해 좋은 씨를 뿌리는 데 도움이 될까요?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 것입니다.
진정한 나의 영토를 넓혀 가고자 한다면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손아귀에 다 넣기 보다는 아들딸 등 다음 사람을 위해 좋은 씨를 뿌려주고 또 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영리합니다.
영리하기는 지극히 영리한데, 약하기는 또 지극히 약합니다.
왜 영리한데도 약한가?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것.
이것 이상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이시여, 믿겠습니다.
저를 믿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제가 행동하는 것을 믿겠습니다.
조금도 헛되지 않게 믿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 내가 나를 믿는 것, 이것이 가장 앞서야 하고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돈 잘 벌게 해주세요.
우리 아들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 이것은 더 뒤쪽의 일입니다.
여든 중반의 나도 노쇠함과 병 때문에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늙음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나의 근본을 잘 보존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나의 근본은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내 것으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근본을 지키지 않고, 내가 나를 잘 이끌어 나가지 않는데 누가 나를 밝고 바른 쪽으로 부유한 쪽으로 이끌어 가겠습니까? 나는 누구에게 건 어떠한 장소에서 건 부탁을 드립니다.
“강한 자부심으로 나를 믿고, 강한 신념으로 나를 믿으며 살아가거라.
나에 대한 믿음은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 부디 나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품고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나를 참되게 살리는 노력! 얼마나 좋습니까? 나를 참되게 살리는 노력!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나를 참되게 살리는 노력! 얼마나 훌륭하고 복됩니까? 정녕 이와 같은 불자가 되기를 두 손 모아 축원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