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자기 발견이 부처님 가르침

자기 발견이 부처님 가르침 /서암 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자기 발견이다.

세상의 유사 종교들은 어느 위대한 신이나 어떠한 위대한 힘을 바깥에 두고 거기서 헤매고 의지하고 발원하고 희구하는 가르침이지만, 부처님은 절대 자기다.

그것을 한마디로 한 것이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에서나 내가 제일 높다”는 것이지.

하늘 위에 어떠한 조물주나 어느 신이라는, 내 인생을 간섭하는 물건도 없고, 또한 하늘 아래도 내 인생을 간섭할 물건이 없다.

바로 자기가 우주 만유의 주인이요 핵심이다.

그러나 중생은 이러한 간단 명료한 소리가 한 소리에 귀에 들어가지 못하지.

그래서 얼떨떨하니 뭐가 뭔지 정신 없이 살고 있어.

자기 인생을 똑바로 보라는 것이 불교야.

그 자기 인생을 똑바로 보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다생에 익힌 습관 때문에 그걸 못해.

그러나 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그것을 벗어나 참다운 자기를 볼 수 있는 빛이 열리기도 한다 말이야.

불교에는 그런 부사의 도리가 많아.

옛날에 청담 스님이 도선사에 계실 때 다 죽어 가는 사람이 와도 절을 3천 배를 시켰어.

성한 사람도 3천 배 하기 힘드는데 다 죽게 되어 기어온 사람에게도 3천 배를 하라 그랬다 말이지.

그 때 병원에서 의사들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한 보살이 ‘내가 어차피 죽을 바에야 선지식 앞에서 말 한마디라도 듣고 죽겠다’고 도선사에 엉금엉금 기다시피 왔어.

그 사람에게 청담 스님이 앉아서 하시는 말씀이 ‘3천 배를 해라.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하셨거든.

그 사람은 청담 스님의 그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듣고 그렇게 하겠다 했지.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아, 걷는 것도 힘들어 겨우겨우 억지로 기어 올라온 사람이 어떻게 3천 배를 할 것이냐’ 했지만, 이 사람은 죽든지 살든지 도인의 말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으로 딱 믿고 3천 배를 한 거야.

그런데 막상 절을 시작해 보니 하면 할수록 기운이 나는 것이라.

그래 자꾸 할수록 기운이 더 나더니 며칠 안 가서 병이 다 나아서 걸어갔거든.

이게 무슨 힘이냐? 이것은 중생이 따져서 아는 세계가 아니야.

이것은 참으로 불보살의 미묘한 가피력이지.

이런 얘기를 하려들면 노장이 아는 얘기만 해도 끝이 없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부처님의 미묘 난사한 법은 우리 중생의 소견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야.

중생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그 아는 것이 사실은 몇 푼어치 안 돼.

요새 천하의 박사라는 사람도, 뭐 훌륭한 인물이라 하는 이들도 알고 보면 다 깜깜한 사람이야.

자기가 모태에 10달 동안 들어 있었지만, 모태 일을 물으면 모르거든.

자기가 모태 안에서 있었던 일도 모르는데, 그러한 위인이 자기 근본을 어떻게 알겠어.

또 죽을 때도 정신 없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

헛소리하고.

이렇게 오는 것도 모르고 가는 것도 모르고 자기를 모른다.

자기를 모르는 그게 이름이 중생이지.

그러니까 사는 것이 깜깜해.

욕심만 부리고 서로 싸우고 원수 맺고.

전 세계가 그렇게 살아.

그래 사바 세계라 그래.

그런데 그렇게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해서 되겠느냐 이거야.

부처님 법을 알면 몸은 천 번 만 번 바꿔서 나도 생명은 불생 불멸이야.

억만 겁을 가도 자기 빛은 변하지 않아.

그렇게 밝게 알아야 하지 않겠어? 밝게 알아야 가고 오는 재미가 있을 것 아니야.

깜깜하게 몰라서 되겠느냐 이거지.

그런 빛나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니 서로 원수 맺고 서로 싸우고 하는 것이야.

부처님은 동체 대비요, 자비 무적이라.

전 중생을 내 몸같이 생각하라, 어떠한 사람도 밉게 보지 말라 했거든.

그것이 부처님 대자비지.

그렇게 살 때 좀 사는 멋이 있는 것인데, 요새 세상 사람들은 친하다가도 금새 원수 맺고, 돈 몇 푼에 칼부림이 나고 하니 이 얼마나 괴로운 세상이야.

옛날에 고려장이라 해서 나이 칠십이 되면 다 들어다 땅 속에 묻었거든.

나는 그것 참 잘했다고 생각해.

땅 속에 묻히면 그에게 욕망이고 희망이 있겠어? 욕망도 없고 친한 이도 없고 미운 이도 없고 자기 혼자야.

그런 곳에서 먹을 것이 좀 있다 해서 며칠 살면 뭐 하겠어.

그 먹을 것도 다 떨어진 그 다음에는 자기 문제 하나밖에 안 나타나.

친한 이도 없고, 원수도 없고, 아들 딸이니 뭐 사랑하는 이고 미워하는 이고 다 떨어 버리고 오직 자기 하나밖에 없으니 ‘이 뭣고!’가 절로 돼.

이 뭐냐 이거야? 내라는 인생이 이게 뭐냐? 의심이 딱 될 것 아니야.

그러니 견성 오도 안 할 사람이 없지.

그야말로 모든 시비가 떨어지고 자기 문제 하나만 오롯이 남을 것 아냐? 그게 화두야.

이게 뭐냐? 나라는 존재가 뭐냐? 미운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아무리 다이아몬드가 좋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야 그런 것은 아무 가치가 없어.

오직 자기 문제 하나만 오롯이 남는다 말이야.

그게 화두야.

화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오늘 저녁에 죽으면서도 죽는 것을 모르지.

모르니 몇천 년 살 준비만 하지.

그러니까 공부를 못해.

그런데 모든 것이 딱 떨어져 자기 문제밖에 안 남게 되니 저절로 ‘이 뭣고’하나밖에 없게 되잖아? 그러니 견성 오도 안 할 수가 없지.

그래서 고려장이 잘된 거라는 말이야.

내가 그 때 났으면 벌써 성불해서 저 도솔천에 있을 텐데.

견성 오도가 이 망상 때문에 안 돼.

내 것이 있다, 네 것이 있다, 뭐 온갖 시비 때문에 안 된다 말이야.

옛날 중국에 방거사라고 아주 잘 살던 부자가 있었지.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처님 법 전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집안에 와서 가족 회의를 해서 집안의 모든 재산을 다 흩어 버리고, ‘우리 하루 벌어서 하루 살면서 공부하자.

’ 그렇게 발심을 한 거야.

그래 그 말에 동의가 돼서, 집안 식구가 다 발심을 해서 요새 말로 하면 다이아몬드 같은 보배를 전부 동정호라는 큰 못에 다 집어넣었어.

그 일을 안 사람이 아까워하면서, “자기가 싫으면 남을 주지 그 귀한 것을 왜 다 갖다 버리느냐” 했거든.

그러니까 그 방거사 하는 말이, “아, 이 답답한 양반아.

내가 생각해도 좋은 것이면 남을 주지만, 내가 싫어서 버리고 가는 마당에 그걸 누구를 주느냐?” 했다 말이야.

사람들이 모두 보배다 해서 거기에 매달려 정신 없이 사니 이것이 독약이다 말이야.

그런 독약을 누구를 주느냐.

그래 아무도 못 가지게 못에다 집어넣었다고 했지.

그리고 식구가 각각 남의 머슴을 살면서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아갔어.

재산 다 흩어 주고 말이야.

다이아몬드라고 해 봐야 그것이 먹지도 못하고 소화도 안 되고 그 뭐 할 거냐.

그래 가지고 다 흩어 주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지.

그래서 식구가 다 견성 오도했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것이 정진이야.

맨날 편안하게 조상이 물려 준 재산으로 먹다 보니 사람들이 다 흐려진 면도 많아.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정진이야.

방거사뿐만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도 용맹스럽게 공부를 해서 도를 이룬 이를 거사라고 그러지.

부처님 당시 인물인 유마 거사는 십대 제자보다 훨씬 소견이 앞섰어.

우리 나라도 부설 거사, 윤필 거사 등 훌륭하게 정진한 인물들이 많아.

욕심에 끄달려 살기 쉬운 것이 세상살이라 보통 거사가 견성 오도 이루는 정진을 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부처님의 법을 외호만 해도 그 공덕으로 행복되게 살 수 있는 도리가 있지.

이것이 부처님 법의 위대한 이치야.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끝이 없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그러한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좀 알아야 해.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은 작은 저울에 따져서 아는 것이라 몇 푼어치 안 돼요.

신비한 부처님의 가피가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

이런 불교가 발전하면 나라가 발전하고, 불교가 병들면 나라가 병드는 것이야.

오늘날 한국 불교는 신라나 고려 때마냥 건전한 불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옛날에는 스님을 인천사라.

사람 인자, 하늘 천자.

인간 세상의 스승일 뿐 아니라 천상 세계에도 스승이다 할 만했다 이 말이야.

본시 불교 승려는 무소유라.

자기 것이 없어.

여기 훌륭하게 절을 이룩하고 조실 스님 이하 여러 스님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부처님 재산이지 자기 재산이라는 것은 꿈에도 없다 말이야.

그래 무소유야.

내 소유는 없다 말이야.

그래 스님네가 공부하고 모든 시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밤잠을 안 자고 모든 인간의 욕락을 포기하고 뼈 빠지게 공부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모든 시주의 은혜를 갚는 것이지.

그리고 모든 시주가 그 공덕으로 자손 만대에 복스럽게 사는 덕이 된다 말이야.

그렇게 스님네는 무소유라, 내 소유는 하나도 없지만, 천하에 내 것 아닌 것이 없지.

그러니까 재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그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 말세에도 전 세계에 불교 문화가 자꾸 번져 나갈 수 있지.

불교가 바로 서야 모든 문화가 바로 서는 것이야.

그러니까 불교 문화가 병들면 모든 문화가 병들게 되지.

여기 사부 대중이 모였는데 같이 승단을 이루고 있으니까, 여러분들 모두 마음 공부를 해서 이 나라에 지도자가 되고, 방방곡곡에 빛이 되어 신라, 백제, 고려의 그 문화로 돌아가게끔 우리가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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