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스님─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깨달음의 길을 걸어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깨달음의 길을 걸어라◆

– 제주 약천사 회주 혜인 스님 – 입적하신 법장 총무원장 스님이 영명사 기도입재 법문을 설하기로 예정 됐었는데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도량에 들어서며 법장 원장 스님의 추모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가슴 뭉클했습니다.

중생과 불교를 위해 항상 애쓰시던 생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비록 육신은 이곳에 안 계시지만 고구정녕한 스님의 영적 본래면목 주인공은 이 자리에 함께 하며 친히 청법 대중을 굽어 살펴 주시고 계실 겁니다.

불교란 마음 찾는 종교요, 마음 보는 종교이며, 마음 깨닫는 종교입니다.

마음 하나 잘 작용시키면 자신의 모습도, 행동도, 말도 달라집니다.

똑같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잘 사용하면 극락이요 부처지만, 잘못 사용 하면 지옥이요 불행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운사람, 고운사람 차별 말고 상대가 누구든 고마운 사람, 부처님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 잘 쓰면 부처 중국 오대산은 문수보살님이 상주하는 도량인데 그곳에 발탑사(髮塔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한 절에서 만발공양 무차대회 법회가 봉행 되던 어느 날 한 여자가 동자승과 함께 개를 데리고 도량에 들어섰습니다.

개가 도량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볼 일’까지 보자 대중들은 개를 데리고 온 여자에게 화를 냄은 물론‘저 개를 패 주어여 한다’며 불평했습니다.

이에 여자는 오히려 “볼 일 안보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호통치며 원주를 불러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습니다.

원주가 만발공양 무차법회 있다고 답하자 가위를 갖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연인즉“머리카락을 잘라 부처님께 올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위와 쟁반을 갖다 주자 여자는 그 자리서 손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쟁반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을 지켜 본 대중들은 “보살”이라고 칭송하며 그 여자를 따뜻이 맞이했습니다.

법회가 오래 지속되자 여자는 원주 스님에게 밥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원주 스님이“법회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밥을 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지만 여자는“나도 머리카락 보시를 했으니 밥 먹을 자격이 있다”며 당장 가져오라고 또다시 호통쳤습니다.

원주 스님은 법회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여자 요구대로 밥 한 그릇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동자와 개도 먹어야 한다면 밥을 더 요구했습니다.

개밥까지도 갖다 주었는데 그 여자는 “ 임신을 했다”며 한 그릇 더 요구했습니다.

당돌한 여자의 돌출 행동을 보다 못한 대중이 “냄새나는 머리카락 보다 밥값이 더 들겠다”며 소리쳤고 이에 여자는“그럼 밥 안 먹고 머리카락 다시 가져가겠다”며 동자를 시켜 머리카락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동자승이 머리카락을 여자의 머리에 대자마자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르기 전의 예전과 똑같이 붙은 겁니다.

사람들이 이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때 그 여자는“좀 전에 이 개를 패고 싶다 했는데 남이 내 개를 패는 것은 원치 않으니 내가 직접 땅에다 팽개칠 터이니 잘 보라”며 개를 땅에다 내리 꽂았습니다.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진 그 개는 곧바로 청사자로 변했고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습니다.

여자는 동자승을 데리고 청사자 등에 올라타고는 허공을 날아오르며 “중생들이여 평등한 마음을 배워라”라고 일갈했습니다.

침 뱉으면 마를 때까지 두어라 말로는 마음을 넓게 쓰라 하면서 ‘볼일 보는’ 개가 미워 패려 하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머리카락 자르기 전에는 ‘못된 여자’였다가 자르고 나니 바로 ‘보살’로 부르는 그 마음을 보십시오.

만발공양 무차법회에서 떡과 과일만 잘 올렸지 진실로 중요한 마음 한 자락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대중들은 문수보살에게 참회하며 중생을 위해 법문 한 구절만 들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때 문수보살님은 이렇게 설했습니다.

“때리면 맞고 밀치면 뒹굴 뿐.

얼굴에 침을 뱉거들랑 마를 때까지 그냥 두어라.

이런 사람을 보살이라 이름 하나니라.”

이에 대중이 “머리카락 몇 올이라도 남겨 주시면 보전하여 문수보살님의 오신 뜻을 새기겠다”고 전하자 문수보살은 “쟁반위에 몇 올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사라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발탑사의 유래입니다.

문수보살님의 법문이 바로 인욕의 극치입니다.

인욕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입니다.

인욕정진을 한 사람의 마음은 곧 자비입니다.

우리는 자비심의 씨앗을 심어야만 합니다.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곧게 합니다.

목수는 나무를 깎아 다듬고 뱃사공은 배를 나르며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룹니다.

혼자 있어도 게으르지 않으며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언제나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며 당당하게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새가 허공을 날더라도 허공에 새 발자국이 없듯이 내 가슴 가운데 미운 사람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더러운 오물이라도 흙으로 덮어주고 묻어주면 훌륭한 거름을 만들어 내듯이, 잘못한 사람을 덮어주고 묻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하면 훌륭한 복덕을 얻을 것입니다.

자비심 내야 은인 만나 70의 노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높은 산에 까치집만한 암자를 짓고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암자에 도둑이 들었는데 하필 그 시간이 새벽 두 시였습니다.

스님이 가만히 보니 공양간에 들어가 쌀을 자루에 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벌써 잡으려 했겠습니다만 스님은 감기로 인해 나오려는 기침까지도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쌀을 너무 많이 자루에 담아서 지게를 지고 가는 그 도둑이 자꾸 넘어지지 않습니까? 보다 못한 스님이 지게를 지고 가는 도둑에게 힘을 보탰습니다.

스님을 보고 놀란 도둑이 “죽을 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구하자 큰 스님은 “죽을 죄는 아니다”라며 “도량에서는 그렇다 치고 외나무다리는 어떻게 건너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도둑은“그래도 지고 가겠다”고 답했습니다.

큰 스님은 연등을 켜 도둑의 앞길을 비춰주며 외나무다리까지 건너게 한 후 큰 길까지 안내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도 돌아가겠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축원이라도 올려주겠다.

도 선생님, 쌀 한가마 가져가서 건강하고 착한사람 되시고 떨어지면 두 시에 오지 말고 낮에 오소.”

마음에 미운사람 두지 말아야 도둑은 집에 돌아와서도 큰 스님 생각뿐이었습니다.

“극락이 있다면 스님이 갈 것이요, 지 옥이 있다면 내가 갈 것이다.

이제 도둑질은 하지 말자.”

그 도둑은 톱과 지게를 지고 그 절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썩은 나무를 베어다 장작을 만들었습니다.

스님은 그 도둑이 하루 일 할 때마다 쌀 한 바가지를 퍼주었습니다.

이러하기를 6개월.

어느 날 일을 다 하고 스님께 인사드리려 했는데 스님이 보이지 않아 온 도량을 뒤졌습니다.

큰 스님은 식중독에 걸려 화장실에 가던 중 웅덩이에 빠져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도둑은 전에 쌀을 훔쳐 지고 간 지게에 스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치료를 받고 깨어난 스님은 도둑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은인이요.”

여러분, 은인은 부처님이 보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을 내는 사람에게 은인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절에서 기도만 한다고 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과 이웃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십시오.

한량없는 복덕은 그 자리서 나옵니다.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절에 와서 복 달라고 빌어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순진무구한 마음, 차 별 없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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