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산스님─부처님과 함께 하는 마음

부처님과 함께 하는 마음

법산스님

마음은 본래 빈 것이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어 넉넉하고, 맑고 깨끗하여 무엇이나 담고 그릴 수 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부처를 담으면 부처가 되고, 연꽃을 그리면 연꽃이 된다 참으로 훌륭하고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 모양도 볼 수 없고 색깔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모양과 색깔도 알고, 미워하고 사랑할 줄도 알며, 무엇이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머리에 있을까, 가슴에 있을까?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옛날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婆羅堤尊者)에게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존자는, ”견성 (見性)한 것이 부처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스님께서는 견성하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불성 (佛性)을 보았습니다 ” ”그 성 (性)이 어디 있습니까?” ”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현재 작용하고 있지만 왕 스스로기 보지 못합니다.

” ”내게도 그것이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하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만일 왕이 작용하시지 않으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이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에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에 나타납니다.

” ”그 여덟 군데에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 ”태(胎)에 있을 때는 몸이요, 세상에 있을 때는 사람이며, 눈에 있을 때에는 보는 것이요,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 것이요,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를 맡는 것이요, 혀에 있을 때는 말하는 것이며, 손에 있을 때는 쥐는 것이요,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니는 것입니다.

두루 나타나면 항 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를 모두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낱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이는 이것을 불성(佛’陸)이라 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 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열리어 깨달았다.

불성(佛性)은 마음과 다르지 않고 마음을 알고 작용하는 실체가 본성 (本’注)이다 사람의 본 성품은 샘물처럼 맑고 깨끗한 것으로 이를 깨달아 알면 견성(見’1生)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티끌이 섞인 더러운 물과 같고 꽁꽁언 얼음과 같아서 자기 본성이 갖추고 있는 작용을 다할 수 없다 그 마음의 티끌을 제거하고 얼음을 녹여버리면 물은 본래의 자기 성품과 작용을 할 수 있듯이, 한 생각 돌이켜 물든 중생심의 벽을 허물고 본래 청정한 자성(自’注)을 드러내면 곧 바른 깨달음을 성취했다 할 수 있고 이를 성불(成佛)이라 한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성불하는 길이며, 다시 말하면 삼귀의(三歸依)의 실천이 곧 성불로 가는 방법이다.

성불은 자기 성품의 본질을 깨달아 증득한 상태이므로, 모든 것에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모든 것을 비추어 잘 알기 때문에 무슨 작용이든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우리가 항상 작용하면서도 자성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청정한 마음이 흐려져 빛을 잃은 무명(無明)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마음이 어리석어 자성을 알지 못하는 이를 중생이라하고, 한 마음을 깨달아 자성을 훤히 아는 이를 부처라 한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한마음의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정도이나, 한마음의 실체는 중생과 부처에 다름이 없다.

성불한다는 의미는 부처와 하나 된다는 의미이며 부처와 하나 됨은 곧 견성(見섀生)해야만 되는 것이다.

견성하여 부처와 하나 되면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이 모두 없어지게 된다.

부처와 하나 되어 부처님과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사십이장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가 나에게 수천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의 계(戒)를 생각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비록 내 곁에 있으며 항상 나를 본다고 할지라도 나의 계를 따르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듯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의 진리 말씀이라도 배우고 익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염불은 부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는 것이다.

마음에 부처님을 담으면 마음은 부처님의 세계로 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생활 자체가 모두 불교가 된다.

마음에 담겨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으로 손과 발에 명령하여 실천토록 해야 한다.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면 우리는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부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부처님 곁에 있으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계율의 실천은 중생심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행을 길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부처님의 행동과 같이되면, 우리는 부처가 된다.

부처와 하나가 된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을 여읜 성자이듯이 우리도 괴로움이 없는 성자가 된다.

불교신자는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고 부처님으로 가는 길을 계율을 잘 지켜 생활화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 가신 지 오래고 부처님 태어나신 곳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부처님과 함께 하게 된다.

계율이란 상징적 규범이며, 자성의 보호망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따로이 지키고 찾을 것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우리 생활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지고, 걸어다니는 것이 마음에 있고, 마음의 본성을 알고 찾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곧 부처이고 깨달은 자가 부처님이다.

우리 모두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부처님에게로 가까이 가고,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와 함께 하게 되리라.

성불합시다.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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