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마음하나 밝히면 이곳이 극락

마음하나 밝히면 이곳이 극락 서암 큰스님 모습은 천차만별, 근본은 모두 부처 참선을 해서 그 마음을 밝히고 보면, 한 가지 이치를 꿰뚫어 그야말로 죽은 사람을 천도하는 것이나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을 천도하는 것이나 그 이치가 똑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컵의 물을 끓여 그 물이 증발해 안개나 구름이 되었다 해도 물을 없어진 것이 아닙 니다.

단지 위치만 바뀐 것이지요.

이 몸뚱이도 죽으면 박가의 아들로 태어 났다, 김가의 딸로 태어났다,그러다 어찌 잘못하여 짐슴도 되고, 잘하면 천당도 가고, 또 완전히 해탈하 면 부처의 세계에서 불생불멸의 자리를 획득 하는 이것이 바로 물이 순환하는 이치 그대로 입니다.

우리가 깨달으면 일체 순환을 해도 내내 그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리 삶의 모습이 천자만변로 일어 나지만 내내 부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영가천도의식 중에는 잘못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원시불교에는 없던 것들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불교가 왜곡되다 보니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런 것을 오늘날까지도 고집스럽게 그대로 따라 하니 답답합니다.

오늘날은 첨단 과학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어느 구석에서 모슨 일이 일어 나는지 안방에서도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아주 지혜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아이들이 노인보다 몇배 앞서 있어요.

사실 우리도 늙어 죽으면 새로 태어나 아이가 될 것 아니겠어요.

? 그러니 다 동갑이지 나이 한 살 더 먹은 사람이 없습니다.

껍데기 옷만 바꾸어 입었지, 그 자리에 변동이 없어요.

눈이 녹아 물이 되고 이것이 증발하여 구름되고, 또 눈이 되고 우박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지, 어디 그것이 변해졌습니까? 그 물이 돌아오면 다시 물이 되는 것이지요.

알고보면 이 세상 사람은 전부 동갑이고 절대 평등이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었다고 해서 영가가 있는 곳이 무슨 별세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가천도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사람 천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 사람도 부처님 말씀만 따라 가면 헤맬 일이 없는데, 옳은 길을 등지고 그저 제 고집대로 살아서 헤매는 것처럼영가도 그렇게 미혹한 상태로 헤매고 있는 겁니다.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우리가 돌아다닐 때 몸뚱이는 놓아 두고 마음만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째 돌아다닙니다.

우리 몸의 반은 방안에 두고 돌아다니는것이 아니라 전부를 갖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꿈을 깨고 나니까 마음만 돌아다닌 것이지, 깨기 전에는 100% 인생이 돌아다닌 겁니다.

영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몸뚱이를 두고 떠났지 영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옆 사람이 송장을 치우고 화장해 버려 없는 줄 알지만, 그 죽은 사람 본인은 자기가 죽은 줄 모릅니다.

꿈에도 잠자고 있는 자기 몸을 모르고 꿈꾸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 영가를 천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음식 많이 차려 놓고, 또 일부러 옷을 맞추어 놓고 이것을 불에 태워 영가에게 준다고 하는데, 멀쩡한 옷도 가져 가기 힘든데 태운 재를 어떻게 붙여 가지고 입고 가겠습니까? 그렇다면 밥도 태워야 먹을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련한 짓이며 도무지 판단력이 없는 것이 유치원 불교라고 할까요? 물론 유치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뒤떨어진 불교에만 매달려서야 어떻게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불법을 바로 세우고 세상을 바르게 이끌 세상 사람보다 한 발 앞서야 합니다.

같은 대열에 끼여서도 안 되고 아퍼서 해야 세상을 제도할 수 있습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천도되는 법

영가천도하는 것도 우리가 불법을 공부하는 힘과 밝은 그 마음으로 이심전심하여 제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확성기로 크게 소리내어 봤자 공부해 온 그 마음 없이 형식만으로는 영가 귀에 한 마디도 들어 가지 않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귀도 없어지고 눈도 없어졌으니 무엇으로 천도하겠습니까?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잠을 깨지 않는 한, 옆에서 아무리 해도 꿈꾸는 사람의 꿈세계를 관여할 수 없습니다.

같은 방안에서 둘이 꿈을 꾸었다고 해서 똑같은 꿈이 꾸어지지도 않습니다.

또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이 다니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그 사람 꿈에서도 내가 같이 다닌 것은 아닙니다.

절대 독단적인 세계입니다.

이렇게 세계가 다를진대 영가에게 음식을 많이 차려주고 옷을 태워 입혀보낸다는 등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불교에는 사실 없는 것이지요.

그런 좋은 방편으로 어리석은 이를 지도하는 법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보면, 집에 불이 났는데 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 위험을 알리는 아버지의 호소도 듣지 못하자 아버지가 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는 사슴 수레 .

소 수레 .

양 수레를 주겠다고 외쳤고,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남을 해치는 거짓말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이끌고자 임시로 쓴 것으로 방편이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영가천도의 여러 의식들을 그런 방편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 그런 불법이 그런 잠꼬대만 좇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불법을 바로 안다면 영가천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천도기도하는 우리 마음이 참선정진하는 맑은 마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마음으로 영가를 불러세우는 겁니다.

영가는 밥을 먹고 가는 게 아니라 희열로 밥은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법을 전해 주어 미혹의 세계를 떠나게 하는 것이 천도이지, 음식을 잔뜩 차린다고 하여 천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없이 재만 지낸다면 그야말로 아까운 음식,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법안이 있는 이들이 영가를 딱 불러 세워, “네가 그렇게 헤매서 되겠느냐? 꿈을 깨라.

” 라고 할 때 그 마음에 영가의 뜻이 감응하면 영가의 세계가 고쳐지고 천도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로켓을 타고 극락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극락 세계이고 서방 정토입니다.

‘한 티끌 가운데 우주가 있는 것이고, 한없는 세계가 바로 한 생각이다.

‘ 라고 했습니다.

진리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는 것인데 중생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헤맵니다.

우리가 이 꿈을 깨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버립니다.

그러고 보면 온갖 것에 끄달려 온 삶을 일체 후회하게 되지요.

영가가 이러한 법을 얻어 가는 것이 주로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물질만 많이 갖다 바치는 유치원 초등학교 불법만 열심히 합니다.

너도 나도 가져온 쌀로 새로 밥 지어 올리니 식은 밥만 잔뜩 남기게 됩니다.

불공 올린다고 저마다 다기에 담겨 있던 물 버리고 또다시 새물을 떠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조갈증 걸린 것도 아닌데 잘못하면 부처님 물배 터지겠어요.

이게 유치원 불교 아닙니까? 이제 이런 불교에서 탈피하여 귀중한 시간에 우리가 부처님 법에 따라 수행하고 정진할 때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다 저절로 천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야, 아무 집 잿밥이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신도에게서 재 지낼 시주금 몇 백만 원을 받았는데, 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 준비할 물건은 안 사고 아픈 사람 약 주고, 가난한 사람 동냥에 응하면서 다른데 다 써 버리셔습니다.

그러고는 며칠이 지나도록 별일 없이 지내시는 스님을 보고, 곁에 있던 시봉이 큰일났다 싶었지요.

내일 모레가 재 지내는 날이니 북 치고 장구 치고 음식도 잔뜩 차려야 할 텐데, 스님은 맨송맨송하니 꿈쩍않고 앉아 있으니 시봉이 걱정되어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은”재는 내가 벌써 다 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고, 시봉은 그 같은 사실을 그 신도님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신도님도 수준이 높았는지 그러냐고 하며 당일 다시 돈을 얼마 더 주어 상을 차려 놓고 스님을 청했습니다.

이 때 스님께서 법문하시기를, “부처야, 아무 집 잿밥이다.

실컷 먹어라.

“라고 하셨답니다.

우리가 불교의 조리정연한 이치를 외면하고 삿된 데 떨어져 지엽에만 매달려서야 어찌 불교가 사회의 어둠을 밝혀 주겠습니까? 중국에서 불교가 발달했을 때는 불단에 시주물을 갖다 놓아도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절에서는 종 하나만 해도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깨알같이 써넣어서 종 다 버려 놓습니다.

한 생각 일으킬 때 시방제불이 감응하는 것이지, 가서 얘기해야만 알아듣는 부처를 어디에다 써먹겠습니까.

잠자는 불교는 탈피해야 합니다.

팔만대장경에 얘기한 것도 많은데, 어찌 반찬 만들어 재 지내는 법만 이르느냔 말입니다.

영가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갖다 바치는 마을의 제사에서도 사실 조상이 그 밥 덩어리를 먹고 가는 이치는 없습니다.

먹고 간다고 하면 다만 자손의 성의를 먹고 가는 것이지요.

아무리 밥을 떠 놓아도한 숟갈 줄어드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귀신이 맘대로 먹는다고 하면, 안 보이니까 음식점에 들어가 실컷 먹어도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영가는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 베푸는 성의에 감응하여 만족하고, 법을 받아 들여 이고득락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데 관계없이 우리가 모두 마음 하나 밝힐 때 더없이 행복한 극락에 사는 것이고, 미혹한 마음으로 온갖 것에 끄달릴 때 번뇌와 고통이 끊이지 않는 중생계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치를 바로 알고 밝은 마음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영가천도도 불공기도도 모두 헛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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