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불관 노인의 생사해탈 /
현장스님
중국 청나라에 백불관(百不關)이라 불리는 노인이 있었다.
백불관이란 일체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염불에만 마음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60세가 넘은 노인이 한평생 살아온 자취를 더듬어 보니 서글픈 마음 뿐이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자신의 삶 또한 임종이 멀지 않았음을 절감하니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살아생전 공덕과 선행은 닦지 못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만 심어준 일이 생각나 그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또한 과거에 저지른 죄업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이대로 죽게되면 필히 지옥이나 축생의 과보를 받게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도원이란 스님이 효자암이란 암자를 짓고 평생 염불만 하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노인은 공손히 예배드리고 물었다.
“저는 일생동안 세상일에 얽매여서 성인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죄만 짓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임종이 가까워짐을 느끼니 앞일이 캄캄하고 두렵습니다.
극락가기는 원치 않으니 부디 악도(惡道)를 면할 수 있는 법이 있으면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노인의 간곡한 말을 들은 스님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말하였다.
“그러한 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노인께서 이 법문을 그대로 믿고 행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어찌 큰스님의 말씀을 믿지 않겠습니까.
꼭 죄업을 소멸시키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법문을 일러주십시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것을 진실하게 뉘우치고 오직 염불에만 마음을 기울이십시요.
부처님의 공덕을 의지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생사의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게 됩니다.” 하고는 아미타불의 무한한 자비와 서원으로 성취된 극락정토와 그곳에 태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일러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많으나 염불공덕을 성취하는 이는 드물며, 염불하는 사람은 많으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염불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오래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고, 오래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일념(一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염불에 일념이 되어야 염불공덕을 성취하고 임종후에는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됩니다.” 노인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염불정진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일년 이상을 열심히 염불을 했지만 일념의 염불은 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효자암을 찾았다.
“이제 염불의 공덕으로 몸도 마음도 가뿐합니다.
죄많은 이 몸을 구원해 주기 위해 정토법문을 베풀어 주신 부처님과 큰스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심으로 염불은 하지만 지나간 기억 때문에 일념염불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인의 말을 들은 스님이 빙그레 웃으시더니 “노인께서는 톱으로 나무를 켜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많이 잘라봤습니다.” “그러면 톱으로 톱밥도 잘라봤습니까?” “톱밥은 자를 수가 없습니다.” “노인께서는 지금 마음의 톱으로 극락을 건설하고 계십니다.
지나간 과거는 톱밥과 같은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에 마음을 도둑맞지 말고 향기나는 나무를 다듬어 보배궁전을 만들어야 합니다.”하고는 붓을 들어 ‘백불관(百不關)이라 써서 노인에게 주면서 다시 한 마디 하였다.
“염불하다가 지나간 일이 생각나면 곧 바로 백불관!하고 부르십시오.
톱밥을 만지던 손을 다시 일념으로 염불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성(一聲)에 죄업이 소멸되고 몸이 정화되어 부처님의 가피가 느껴져 올 것입니다.” 진실로 감사한 마음의 삼배를 올린 노인은 염불의 정진 속에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밝은 기운이 뻗쳐나왔다.
그리고 길을 갈 적이나 가족들과 함께 할 적에 염불심이 흐트러질 적이면 백불관!하고 소리치며 아미타불 일념을 다시 챙기곤 하였다.
이웃사람들은 그런 연유로 염불노인을 ‘백불관 노인”이라 부르며 공경하였다.
염불할 때 잡념을 쫓는 데는‘백불관’이 아주 좋은 약이 되었다.
이같이 하여 백불관 노인은 일념의 염불이 길어져서 삼매를 얻고 그 속에서 부처님 세계를 훤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환희로운 마음으로 효자암을 찾아갔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해주신 법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습니다.
스님의 은혜로 악도에 떨어질 제가 생사의 업을 벗어나 부처님 세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왕생하게 될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인사 드릴려고 찾아왔습니다.” 하고는 공손히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와 깨끗이 목욕하고 새옷을 갈아 입은 다음 식구들을 모이게 하였다.
“내가 이제 염불의 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하고 극락정토에 가게 되었다.
모두 슬픔의 눈물일랑 보이지 말고 기쁨의 염불로 나의 장례를 장엄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서 “나무아미타불”을 잠깐 염불하더니 그대로 임종하였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집 안을 비추이고 기이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 차서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하였다.
위의 이야기는 왕생록에 실린 백불관 노인의 왕생이야기다.
각성된 의식으로 자성을 관조하고 대상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수행의 이치가‘백불관’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오묘하게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죄업이 소멸되고 몸과 마음이 정화되면 부처님의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되고 부처님의 가피로 생사의 업에서 해탈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아, 염불공덕의 불가사의함이여.
죄업중생의 한 줄기 빛이로다.
아침이슬 우리인생 슬픔 없어지리라.
인간의 삶 의미없다 말하지 말라.
비우고 맑히는 일에 인간의 행복이 있네.
”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을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의 방법이란 가장 소중하고도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수행이란 비유하자면 음식과 같은 것이다.
저마다 식성과 입맛이 다르듯이 업장이 다른 중생들이 닦아가는 수행의 방편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화두선 일변도의 우리 수행환경을 보면 애써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성취한 사람은 보기 어렵다.
또한 많은 대중들은 수행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원래 염불이란‘나무아미타불’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음정근’이나‘지장정근’은 염불이 아닌 ‘ 관음기도,‘지장기도’이렇게 호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해탈 성불하여 중생제도를 발원하는 수행자라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아미타불의 서원과 공덕에 의지하여 염불하면 생사업을 소멸하게 되고 탐·진·치 삼독이 자비심으로 비뀌어 성불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외골수 화두 일념으로 고행 정진해 오신 월인노스님께서 3년전에 정토삼부경을 보고 깊은 믿음을 일으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염불정진으로 돌아오신 일은 초심자들에게 무언의 설법이 아닐 수 없다.
업장을 소멸하고 부처님세계에 태어나는 방법을 설법한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신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은 인간 가운데서 가장 순결한 연꽃이니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며 그는 항상 진리를 떠나지 않고 필경에 부처를 성취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그대는 이와 같은 말을 잘 지녀야 되느니라.
이와같은 말이란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간직하는 일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