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담스님─“중생 죄 많다고 낮지 않고 부처 도 통했다고 높지 않다”-

– “중생 죄 많다고 낮지 않고 부처 도 통했다고 높지 않다”

참선하면 지혜 생겨…나를 잊어버렸다는 생각도 버려야 –

원담스님

(수덕사 방장)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마주대하고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국불교는 1천6백년의 역사 동안 명맥이 마치 가는 실과 같았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근래들어 불교가 안정적인 것 같습니다만 참다운 불교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앞으로 불교가 산중 불교가 아닌 중생과 함께 부딪히고 포교하며 수도하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그것은 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법문을 듣는 일 자체가 더없이 휼륭한 일이자 밝은 미래불교를 여는 단초입니다.

현대의 불교는 형식불교이지 참다운 정각(正覺) 불교라 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나 자신이 나를 깨닫는 법이지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신을 믿는 것처럼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지요.

때문에 우리들에겐 ‘나’를 찾을 별도의 장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필요없고 형식이 필요없습니다.

비록 절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아무리 알아주지 않는 어느 처마 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나’ 대신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절이나 부처가 있는 곳에 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란 존재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곳이 어디던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나’를 찾기 위해 정진할 수 있습니다.

있는 곳에서 참다운 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 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에 기대하는 바가 크며 여러분들의 물러서지 않는 신심에 머리 숙여 존경하는 것입니다.

춘색무고(春色無高)한데 화지자장단(花枝自長短)이라.

봄빛은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똑같이 피어 차별이 없고,

꽃가지는 긴 것 짧은 것이 저절로 그러하다.

그러나 꽃가지가 길건 짧건 분명한 꽃이며 제 나름의 꽃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꽃 모양은 제각기 아름다운데 꽃가지만 길고 짧을 뿐입니다.

여기서 길고 짧다는 것은 시각적 현상인데 길고 짧은 것이 동일하다는 이치를 살필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서울 주변의 나지막한 산 꼭대기 보다 삼각산 꼭대기가 높고, 한강의 물은 그 보다 훨씬 얕습니다.

그렇지만 한강물과 삼각산 꼭대기를 긴 줄로 대어보면 수평이 똑같습니다.

수평이 같을 때 일체가 평안한 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중생은 죄가 많아서 낮은 것이아니고, 부처는 도를 통해서 높은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평등한 도리가 있습니다.

평등한 도리가 있으니까 우리들은 그 도리를 찾아야 됩니다.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승부욕만 있으면 하늘이 여러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고 했습니다.

승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늘도 있고 땅도 있는 것입니다.

천지는 반드시 정신이 있고 알맹이가 있습니다.

알맹이가 있고 정신이 있는 천지(天地)라면 정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헛되지 않도록 그 결과를 드러낼 것입니다.

내가 정진할 때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진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때는 잠도 안자고 먹는 것도 부실하여 몸 가누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나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병이 있었어요.

옆구리가 결리는 병인데 무슨 늑막염도 아니고, 그 병이 일어나면 전신을 꼼짝할 수 조차 없었어요.

숨도 못쉬어서 무척 고통스러웠는 데 발작할 때마다 한 사흘씩은 잠도 잘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으며, 그래서 밥도 먹을 수 없었어요.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사는데 숨도 못쉬고, 몸뚱이를 움직거려야 사는 데 한 사나흘씩 움직이지 못하면 죽을 지경이 되지요.

그 무렵 공부가 무엇이고 어떠한 위력을 지닌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러한 병이 생겼으므로 시험해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삶과 죽음을 용감하게 끊는다(生死勇斷)는 말이 있는데 이 공부도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문득 잠이 들었어요.

가물가물한 잠 속에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그림을 들여다 보다가 병이 나서 고통을 받았는데 꿈 속에서 다시 병이 들었어요.

그 그림 속에는 이 세상에서 처음보는 형체가 나오는데 머리가 한 3백개도 더 되고, 입에서 불이 나오며 발톱이 낫같이 생긴 하여간 보기만 해도 기절초풍할 것처럼 생긴 물건이었어요.

그 물건이 앞으로 나와 발톱이나 이빨로 나를 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운이 나를 눌러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염라사자 더라구요.

염라사자를 내 눈으로 보았어요.

그것이 나를 묶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의 육신을 꼼짝도 못하게 하고, 숨도 못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하니까 눈·귀·코·혀·몸·의식이 모두 마비가 되었어요.

그 물건이 내게 다가오기만 하면 꼼짝 못하고 죽을 지경이란 말예요.

저 물건이 나를 잡으러 오는 무상살비인데 저놈을 어떻게 접대해야할지 묘책이 없었어요.

그땐 내가 젊었으니까 ‘네까짓 것이 아무리 그래 보아야 내가 용트림 한번하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 생각하고, 막상 해보니까 나의 젊은 용기로는 어림 없었어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볼라 치면 더욱 숨이 막히고 옭쬐는 겁니다.

맥이 정지되는 상태라 그냥 놓아두면 죽을 것만 같았어요.

속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이렇듯 공부도 못하고 죽으면 너무 억울하다 싶었지요.

그래서 화두를 사용해 보기로 작정했어요.

문득 만법귀일(萬法歸一)이란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 화두를 형식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용기를 가지고 들어갔어요.

만법귀일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을 잊어버리고,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생각에 잠겨버렸어요.

그랬더니 나를 꼼짝할 수 없도록 결박했던 것이 저절로 풀어지면서 그 무섭게 생긴 물건은 점차 멀리 사라졌어요.

내가 화두를 들었더니 꼼짝할 수 없던 손가락이 움직여지고, 막혔던 숨통도 확 트였어요.

그토록 뜨려고 애를 써도 떠지지 않던 눈을 떠보니 정상적이었어요.

내가 깨어날 때가 되어서 깨었나, 화두를 들어서 깨어났나 시험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두도 안들고 멍청하게 있어 봤지요.

그것이 도로 생겨나 볼 수 있도록 화두를 놓고 멍청하게 있었어요.

그랬더니 역시 그 물건이 다시 나타났어요.

정말 무섭고 징그럽게 생긴 물건이 날 억압하는 데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 먼저의 경험을 살려 죽기 직전에 다시 화두를 들었어요.

마찬가지로 묶였던 것이 풀리고 정지되었던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까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어요.

위험한 일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일어나 보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사람 죽는 것이 어려운 만큼 태어나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몸뚱이 벗는 순간도 그 만큼 어려워요.

생사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죽어 보았으므로 죽음을 쫓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선입니다.

참선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통달하면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겁니다.

후에 가만히 앉아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해보니 죽을 때 저승사자가 나를 쫓아와서 잡아가더라도 나는 하나도 겁날 것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또 한번 그러한 일을 당했어요.

밤에 자다가 겪은 것입니다.

기둥에 용을 새겨 붙여 놓았는데 사라가용왕이라 합니다.

옆 사람들은 그 용이 살아나면 큰일난다고 해요.

그래 제까짓 것이 아무리 사라가용왕 아니라 그 할아비라도 내겐 별것이 아니다.

나한테 덤벼 보아라 하고 살려주었지요.

역시 전에 경험했던 나찰귀처럼 무서운 용이 달려들어 내 몸둥이를 감기 시작했어요.

그래 얼마나 감는가 실컷 감아보라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감아서 바짝 조이는데 그 힘이 대단했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아! 사람이 죽을 적에는 이렇게 죽는가 보다 하면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았습니다.

공기의 인력이 얼마나 되는가 시험해 보기 위해 몸뚱이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참아 보았어요.

점점 더 조여들어와 육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없이 떡하니 화두를 들고 입정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용이 감고 있던 몸뚱이가 슬슬 풀어졌어요.

정말 희안한 일이었어요.

참선이 좋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것은 꿈이 아닌 실재였어요.

그래서 수 많은 수좌들이 밤낮 애를 쓰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지요.

내가 실제로 경험해 보고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어려운 때가 무척 많았는데 가장 어려웠을 때가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쌀을 짊어지고 올라갈 때였어요.

그때도 육신을 시험하기 위해 화두를 들면 그렇게 아프던 등허리가 편안해졌어요.

쌀짐의 무게 보다 화두의 힘이 더 컸던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나쁜놈이라 욕할 때가 가장 참기 어려웠는데 그땐 상대방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하고 싸웁니다.

어디 화가 일어나나 안일어나나 화두로 시험해 보아야겠다 하고 화두에 들어가면 지나가는 사람이 다정해 보이고 미운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내 마음 속에 미운 생각이 없으면 상대방이 나하고 싸우려들지 않고 저절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 때 새삼 화두의 위력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두만 들면 문제가 잘 풀립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면 일념으로 참선을 해보십시요.

미묘한 지혜가 나오며 천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이 나옵니다.

사업하더라도 참선을 하면 운영의 지혜나 난관 극복의 지혜가 나오며, 공동운명체로 화합하며 살 수 있는 슬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하게 해야합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잊어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합니다.

참선한다고 누구한테 자랑하지도 말며, 상을 세워서는 더욱 안됩니다.

참선을 할 때는 부처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선하는 것은 선전이 아니고 나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참선하는 사람만이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는 것은 나를 완성하는 것이며, 자아의 완성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내가 나를 찾을 때 나와의 전쟁도 남과의 불화도 모두 사라져 안심(安心)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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