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광스님─서원 세우고 이타행 실천하면 펄펄 끓는 가마솥도 연꽃세계

서원 세우고 이타행 실천하면 펄펄 끓는 가마솥도 연꽃세계

-통광스님-

불교에서는 자성을 깨쳐서 견성하는 것을 최상의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그런 도리, 즉 자성을 깨쳐서 견성하는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이 세상이 덧없고 괴롭다는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무상을 느낄 때 발심이 되고 발심을 할 때 도에 대한 구도심이

간절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느낀다면 발심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덧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보다 더 나은 가치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현실을 떠난다고 해서

어떤 행복이나 최상의 진리를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도를 추구하고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간화선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남송 때 대혜 스님이 쓴 『서장』에 보면

어느 스님이 연세가 많은 한 스님에게 찾아가 물은 내용이 나옵니다.

젊은 스님이 “스님, 세상이 이렇게 더운데 어느 곳을 향하면

이 뜨거운 더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야 피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젊은 스님은 깜짝 놀라 “어떻게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열기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스님은 “그 속에는 온갖 고통이 이르지 않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문답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세계 곳곳에서 지진과 홍수, 태풍이 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가깝게는 서울거리에

수십 만 개의 촛불들이 밤을 밝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럼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입니다.

그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뜨거운 가마솥 속에는 온갖 고통이

이르지 않느니라’는 것은 오직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 뿐이고

다른 생각이 없어 일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생각이 극도에 이르면 진정한 행복이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조사어록에서도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고 했습니다.

끊어진 곳에서 다시 생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생이 죽어야 부처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생이 뭡니까.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가득한 마음.

그래서 가마솥 속 못지않게 뜨겁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우리들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은 그 중생의

세계에서 벗어나 부처의 경지에 들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생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탐심은 원력으로 바꾸고, 성내는 마음은 자비로,

어리석은 마음은 지혜로 바꿔 그렇게 마음을 쓸 때 비로소

도심(道心)이 우러나게 됩니다.

그것을 흔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들 하지요.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한 생각 바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심을 하지 않으면 도를 닦을 생각도 나오지 않고,

도를 닦을 생각이 나오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최상의 희망과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보리심이라는 한 생각을 돌이키면

펄펄 끓는 가마솥 속이라도 곧 연꽃의 세계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임제 스님의 어록에 의하면

“사대가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르고 허공이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눈앞에 역력하면서도 아무 형체가 없는

이 자체가 이렇게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조 스님에게 어느 스님이 찾아가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랬더니

마조 스님은 “직심시불(直心是佛)이니라.” 곧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그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듣고,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떠나서 부처가 따로 없듯

세상의 행복은 따로 동떨어져 있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 나옹 스님은 각오 선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하니,

나고 죽음의 즈음에 당하여 반드시 힘을 다해 화두를 들지어다.

화두가 성성해지면 일어났다 사라졌다하는 마음이 곧 없어질 것이다.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마음이 없어진 곳을 고요함이라고 한다.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하고,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않으면 신령함이라고 한다.

곧 이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이것은 무너져

소멸되지도 않고 섞여 혼잡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하루도 채 안 돼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깨달아 증득할 때 진정한 행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계종은 간화선을 주된 수행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간화선에서는 도를 통하기 위해서 화두 드는 것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화두를 살피고 공부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것이지요.

사실 한 생각 돌이키면 화두를 들고 말 것도 없이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수겁 동안 중생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바로 깨칠 수 없고 그래서 화두를 들고 이를 참구하다보면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오늘 제가 준비한 주된 내용은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은 잘 알다시피 조계종의 소의경전입니다.

그렇다면 조계종은 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했겠습니까?

그것은 『금강경』에서 보여주는 도리가 현실 그대로가 바로 진리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때 세존께서 밥 때가 되자, 가사를 수하시고 바리때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 그 성안에서 걸식을 하셨다.

차례로 다 걸식을 하시고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식사를 다 드시고 나서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시면 발을 씻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것이 유명한 『금강경』을 설하게 된 근본 요인이 되는 대목입니다.

그 때 수보리 존자가 느닷없이 대중 앞에 나아가 이렇게 찬탄합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해 주시고,

보살들에게 위촉해 주십니다.” 느닷없는 이 찬탄에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평소와 같이 여여하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많은 스님들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궁금히 여기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선의 관점에서 가장 명쾌하게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국의 야부 스님은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해 주시고, 보살들에게 위촉해 주십니다”라는 대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즉 “세존께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수보리가 그렇게 찬탄을 하고 있으니

안목을 갖춘 뛰어난 무리들은 시험 삼아 잘 착안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 최초의 근본자리를 드러낸 구절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을 위해서 하는지를 척

알아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일상생활을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척 알아버리면 된다는 뜻입니다.

『원각경』 서문으로 혈기서(血氣序)를 쓴 당나라 때

배휴라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원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일찍이 원각을

깨치지 못한 것은 중생이고, 원각을 깨닫고자 하되

극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분은 보살이며,

원각을 구족해서 원각에 머물러 원각 그대로 생활하는 분은

바로 부처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살피면

그것이 곧 성불작조(成佛作照)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가 또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선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시오리까.”

그러자 부처님은 “보살마하살은 응당

그 마음을 이렇게 항복시켜야 한다.

즉 태생, 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무상, 유상,

비유상, 비무상 등 구류 중생들을 내가 모두 제도해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리라고 발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다고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또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어떤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이 세상에는 중생을 제도할 부처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이라는 것이 따라오질 않습니다.

만약 내가 그대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그대는 다시

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면,

벌써 상하 계급이 생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상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그럼 대승불교는 무엇입니까.

바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리(自利)보다는 이타(利他)를 우선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되겠다는 아집을 버리고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에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러니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그 생각도 없는 큰 원을 세우고

그 원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럼 그 마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까.

실천덕목은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경전 내용 중에는

보시와 인욕,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정진과 선정, 지계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는 육바라밀을 총칭하는 대명사입니다.

보시는 재시(財施)요, 지계와 인욕은 무외시(無畏施)이고,

정진과 선정, 지혜는 법시(法施)인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바라밀은 육바라밀을 총칭하는 대명사인 것입니다.

재시는 잘 알다시피 재물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또 무외시는 두려움 없는 위신력으로 남에게 베풀어서

모든 불안과 초조한 마음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계를 철저하게 지키고 인욕을 하면 큰 위신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합니다.

옛날 사냥꾼에 쫓기던 비둘기가 아난존자의 그림자에서는 떨었지만

부처님 품에 들어가서는 떨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위신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불안하고 초조하다가도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외시인 것입니다.

그럼 법시는 무엇입니까.

법력을 갖춰 법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듯 보시바라밀 안에는 육바라밀이 모두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보시가 으뜸으로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금강경』에서는 보시를 하되 상에서

머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상에 대해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인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상들이 뭐냐 하면 바로 허망한 몸과 마음이

뭉쳐진 이것을 나라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깨어나면 나라는 것도 없고

주변의 현상들도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에서 나라는 것은 꿈속의

나와 같은 것임에도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법조차도 공하다는 것이

『금강경』의 주된 이론입니다.

즉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일체의 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금강은 견고한 다이아몬드처럼 파괴되지 않고 예리해서

잘 부수어 버릴 수가 있지요.

그래서 일체 상을 부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혜를 드러내는 경전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일체의 상을 부수고 없애 버리면 그 곳에 반야지가 드러나고,

반야지가 드러나면 일체상이 닳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선어록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했습니다.

쌍차는 양단을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고,

쌍조는 동시에 긍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중도 사상을 설명한 것인데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

최상의 행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생멸하는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를

한 번에 ‘탁’ 깨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깨우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한국불교의 문제점은 스님네들이 주로

참선하는 것에만 전념하다보니

이타행을 하는데 소홀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한 길로 두 사람 이상이 함께

가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불법을 펼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라는 뜻이겠지요.

포교에 힘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구류 중생 모두를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에게 이타행을 하는 삶을 살겠다는

원을 세우고 보시를 해야 합니다.

또 보시를 하되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는

무주상 보시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상(相)을 잘 내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잘 키우면 훗날 아이들이 보답하겠지 하는 기대심리,

혹은 자신이 해보지 못한 교육을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바로 상인 것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가령 1억원도 갖지 못했던 사람이 1억원이 생긴다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10억원을 요구하겠지요.

이런 사람은 100억, 1000억 원을 쥔다 해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벼슬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수가 된 사람은 시장이 되고 싶고, 다시 장관, 대

통령이 된다 해도 역시 마음이 허전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상대와 비교하게 되고

그들보다 나은 행복을 좇는 이유입니다.

결코 현상을 좇는 마음은 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욕망을 추구하는 그 마음을 한 생각 돌이켜서

근본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은 곧 견성을 이루는 것이고

견성은 곧 성불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보시,

즉 이타행이 동반될 때 비로소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 스님들의 법문을 그대로 배우고 실천하면서

진여본성을 깨치고 이를 통해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이웃까지 함께 깨칠 수 있도록 한다면

진정한 행복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증오(證悟)의 경지로 함께 갈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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