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몇몇 지인들과 말로만 듣던 베트남을 다녀왔다. 우리나라와는 남다른 인연을 맺은 나라이기에 떠나기 전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다. 사이공ㆍ하노이ㆍ다낭 등 도시 이름과 야자ㆍ파인애플ㆍ바나나 등 열대과일과 밀림ㆍ베트콩ㆍ메콩강ㆍ아오자이ㆍ남십자성 등 을 나름대로 그려보기도 했다. 근 사십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고등학교 선배로 당시에는 꽤나 이름있는 정치인이 후배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월남 파병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대한민국 청년의 피를 팔아 달러를 사는 것’ 이란 섬찟한 표현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햇병아리 교사로서 첫 부임지가 해병교육기지사령부 근처였기에 아침과 저녁 식사는 늘 직업군인들과 뒤섞여서 하였는데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인 때여서 오가는 대화 속에서 ‘누구가 갔단다. 누구가 어떻게 되었단다.’ 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심지어는 며칠 전까지 같이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던 식객들이 말없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명분이야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처럼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 베트남에 자유와 평화를 찾아주기 위해 파병을 한다고 했지만 세계의 시선은 ‘용병’이니 ‘호전국’이니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고, 나라 안팎에서 반전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는 미국과 월맹의 ‘파리 회담’으로 전쟁이 끝나고, 회담을 성사시킨 당시의 미국 국무장관 등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채 반년도 못 가서 월남은 공산화되었으니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베트남을 공산화시킨 공(?)으로 노벨상을 받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피 팔아 달러를 산다’던 선배의 말대로 월남전을 디딤돌로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성장의 대단한 성과를 얻어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삼십 년, 이제 다시 우리의 기업들과 관광객이 베트남으로 몰려가고 있다. 경제교류를 위해, 관광을 위해, 전적지 순례를 위해, 그리고 그 옛날에 맺은 인연을 찾아가는 베트남항공은 만석이었다.
이 괴이한 인연의 나라에 간 것이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읽었던 탄소누트공항은 월남전 당시의 군용 비행장 그대로란다. 무엇보다 내가 궁금했고 관심을 가진 것은 한국인을 , 따이한을 대하는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해줄까. 나의 일행 중에는 35년전 육군 장교로 맹호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안내원이나 현지인을 만날 때마다 제일 먼저 묻는 것이 따이한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감정이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한결같이 특별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무표정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호치민(옛 사이공시)의 시가지는 온통 오토바이 물결이고 오토바이 천국이다. 오토바이들 속에 가끔 자동차가 보일 정도다. 그런데 밀려오고 밀려가는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의 표정도 너나없이 무표정이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도 없는 사람들일까. 표정이 없는 국민들.
사흘쯤 지난 뒤에야 무표정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의 역사가 표정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기원전부터 천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잠시 독립을 맛보았으나 다시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2차대전이 끝나면서 겨우 독립이 되는가 싶더니, 남북이 나누어지고 통일전쟁이 시작되었으니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 희색(喜色)을 띄고 반색하다가는 어떻게 누구로부터 피해를 입을지 모르고, 자칫 적대감이나 서운함을 표현하다가 누구로부터 당할지 모르니까 아예 표정을 지워버린 것이다. 한때는 ‘라이따이한’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며 애타게 찾다가 이제는 그것도 포기한 지 오래라고 한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이 가슴에 묻어둔 상처의 흔적만이라도 느껴봄직도 하겠지만 그러나 무모한 일.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려보아도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2월 (제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