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다림이다. 인생은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기다림으로 끝난다. 어릴 적의 기다림은 본능적이지만 성인이 되면 자기 기대치의 충족을 위한 기다림으로 산다. 외로울 때도 간절히 바랄 때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길 기다린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때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다. 잠시 바쁠 때나 급한 일이 있거나 일시적 쾌락과 만족감으로 기다림을 잊을 수가 있으나 마음의 평정이 찾아지면 다시 기대나 기다림으로 돌아간다.
여기 한평생을 기다리며 살다간 여인이 있다. 초년엔 운명에 대한 저항이 한恨이 되었고, 중년엔 삶에 지쳐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다림으로, 노년엔 체념과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보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첩첩산골에서 다섯 딸의 막내로 태어나 세 살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덟에 8남매 5형제의 막내아들과 혼인을 하였단다. 스물에 맏아들을 낳고 두 살 터울의 딸을 두었으나 일찍 잃고, 다시 스물넷에 둘째아들을 얻으면서 4대 가족 20여명이 함께 사는 큰댁에서 막내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할 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스물다섯 5월 단옷날, 6.25라는 이름의 난리가 한창일 때 지아비가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행복했던 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지어미는 기구한 운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걱정 마라. 곧 돌아올 테니.” 이 한마디의 말을 믿고 기다림의 삶은 시작되었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곧장 전선에 투입되어 몇 차례나 전투에 참가하였을까. 운명의 날, 1952년 10월 28일.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에서 전사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골함을 찾아와 장례를 치렀건만 지어미는 결코 지아비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어도 지어미는 해질녘 사립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미의 기다림은 잠시 고달픈 현실에 묻혀 보이지 않는듯하였지만 두 아들이 하교하길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세월은 흐르는 법, 전쟁이 끝난 지 30년 쯤 되었을 게다. 매스컴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되니 그때부터 노인은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다림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후 노인의 방 TV는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6.25때 국군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조창수(?)’씨가 TV에 나타나 한동안 우리 사회에 파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TV가 구멍이 날 정도로 보기도 했다.
손자 손녀들이 각기 제 길을 가고 나니 자연히 기다림의 대상은 아들과 며느리에게로 바뀌었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귀가할 때까지 노인은 아파트 베란다에 기대서서 오고가는 승용차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기다리곤 하였다.
8순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더러 병원 신세도 지고 몸져눕는 일이 많아졌다. 이따금씩 텃밭에 나가 바람이라도 쏘이지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이 드니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체념의 탓일까. 그도 아니면 무상(無常)을 깨달은 탓일까. 인연因緣의 질긴 끈을 스스로 끊지 못함을 터득하였을까.
그다지도 강한 집착(執着)의 힘이 다 소진되었을까. 그래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 줄 때는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한풀이라도 해 봤고, 실컷 기다리다 지쳐도 보았고, 자식들 키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잠시 잊기도 하고 새로운 보람도 맛보았다.
이제 모든 것 다 접고 텃밭 한번 둘러보고는 아들 며느리에게 쇠고기 국밥 한 그릇 사 먹이고, 며느리 손에 밥 몇 숟갈 받아 잡수시고는 아들 등에 업혀서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가족들의 흐느낌과 아쉬움 속에, 주위 분들의 기도 속에 먼 길 가셨다. 이별이 없는 곳으로, 기다림이 없는 곳으로. 이제는 만남도 헤어짐도 기다림도 재회도 인연소치라는 것을 아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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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