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벽을 허물어라

며칠 전 나는 어느 신도님의 자제분 결혼식에 참석해 주례를 서 준 일이 있다. 신랑 되는 사람의 어머니가 두어 달 전부터 주례부탁을 해와 약속을 해 놓고 날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축하를 하는 뜻에서 주례를 섰다. 작년에 신랑의 아버지가 작고하여 심심한 애도를 표한 바 있는 집안인데 고인이 된 아버지와는 불교를 통해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내가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를 앞에 세워 놓고 간단한 주례사를 했는데 그 요지는 결혼을 하여 부부인연을 맺은 이상 서로의 마음에 벽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하여 평생토록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이었다.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자주해 온 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각자의 개성이 강한 탓인지 부부사이에도 일심동체는 이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 예로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는 이혼율이 미국 다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뜻이 안 맞는 사람 사이에는 가슴에 벽이 가로 막혀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있다. 다시 말해 마음과 마음이 통해지는 정신적 소통공간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상대가 없는 내 혼자만의 마음에는 행복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항상 고독하고 외로움의 슬픔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다만 고도의 명상세계에서 자기의 정체를 찾는 공부에 있어서는 주객을 초월해 버리므로 행과 불행을 다 함께 뛰어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일상적 생활감정은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 답답해지며 불우해지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화는 마음과 마음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서 조성된다. 또 불화란 개개인의 비위가 서로 상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비위가 상하는 원인은 나와 상대의 감정적 충돌 때문이긴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 조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감정을 나쁘게 가지는 것은 내 마음의 조절문제이지 결코 남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대방의 그릇된 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내 마음의 여유 있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감정의 상처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겨울철에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부주의로 감기가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감기의 병원체인 바이러스 등에 증오를 품지 않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감정마찰도 남에게 탓을 하지 않고 내 자신의 부주의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일에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차를 모는 사람이 운전주의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때로는 세상을 살면서 주의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생활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사이가 나쁜 사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정에서 같이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잘못 말해진 실언이 될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이가 나빠지고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믿음이 무너지면 서로를 가로막는 벽이 생기게 된다. 말 한마디에도 독화살에 묻은 독과 같은 것이 있다. 남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말 한마디의 독이 평생토록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히 있다.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잘 낫지 않는다. 누구나 겪는 생존의 상처가 있지만 남으로부터 침해당하는 상처는 견디기 어려운 분노와 원망을 유발하여 자타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기준이 있다. 그른가 옳은가 하는 시비의 기준과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손익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곧잘 남의 그름을 지적하고 흉보기는 잘해도 자신의 그름은 잘 보지 못한다. 시비의 기준을 남에게만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잘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남에게 이익이 되건 손해가 되건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손익만 따지는 이기적 편견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불공정한 마음 때문에 사람사이에 금이 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되는 인간유대가 좋은 사회를 이루는 근본인 것이 분명함에도 우리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해 골이 파이고 벽이 쌓이는 불행한 면들이 노출되고 있다. 나와 남을 같이 보는 공동의 입장에 서서 자리이타를 똑같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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