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
‘산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
중고등학교 시절에 즐겨 외던 고시조들이 줄줄이 되살아난다. 처음 시조는 야은 길재의 시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 옛 도읍지 개성을 쓸쓸히 다시 찾은 충신의 감회를 읊은 것이고, 두 번째 시는 명월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을 유혹했던 시라 했던가. 마지막 시는 백호 임제가 평안감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당대 최고의 명기인 명월을 찾았으나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는지라 그의 무덤을 찾아 술 한잔 부어놓고 지은(?) 시라고 전해진다. 이 일로 인해 평안감사로 부임도 채 하기 전에 파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백호는 개의치 않고 무거운 짐을 벗은 듯이 나선 김에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의 산천경계를 두루 구경하고 돌아왔다 한다.
개성, 서울에서 육로로 70여 km.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려왕조의 옛 도읍지. 마식령산맥의 말단부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있고, 남쪽 일부는 한강과 예성강의 하류 지역으로 좁은 분지를 이루는 곳. 북쪽에 송악산, 동남쪽에 용수산, 서남쪽에 진봉산이 있어 부산대수(負山帶水)의 지세를 형성하여 고려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단다. 해방된 조국에서 잠시 남쪽의 영토였던 개성은 6.25로 인해 북녘 땅이 되고 말았으니 그곳에 가본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 땅 ‘개성’에 갈 기회가 왔다. 12월 중순께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한 기업의 준공식에 지인의 소개로 운 좋게 참석하게 되었다. 그냥 공단 구경만 한다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텐데 개성시내 관광과 함께 예전의 개풍군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장풍군이 된 ‘월고’라는 시골 화강암 탄광까지 구경할 수 있다기에 기를 쓰고 따라 나섰다. 미명의 새벽에 경복궁 옆 주차장에 모여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맨 앞좌석이 비어서 바깥 구경도 할 겸 앞에 앉아서 개성 가는 길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행운이 겹쳤다고나 할까. 몇 년 전 가족들과 같이 자유로를 거쳐 통일전망대와 임진각을 둘러본 적이 있었기에 임진각까지는 크게 낯설지 않았다. 길은 그때보다 더 넓혀졌고 잘 단장되어 있었다.
임진각을 지나 새로 건설된 다리를 건너면서 분단의 현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첩첩이 가로막힌 바리게이트, 길 양쪽의 철조망, 무장한 초병들 …. 접경지역이 가까울수록 차량도 뜸하다. 차내의 일행들도 이야기 소리가 줄어들고, 성에 낀 창을 닦고 바깥을 주시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측 CIQ(세관, 출입국관리, 검역을 하는 곳)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차량들이 많아졌다. 산소용접을 하는 산소탱크를 실은 차, 화공약품을 실은 탱크로리, 연탄, 건설현장의 H-빔, 돌, 시멘트블록, 조경을 하기 위한 나무, 승용차, 플라스틱 파이프 …. 눈에 보이는 것들이 이러니 저 많은 화물차량들 속엔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지인의 표현으로는 물과 모래 외에는 다 가져가야 한단다. 모두가 개성공단 건설현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화강암 광산을 둘러보고, 개성 시내관광에서는 고려박물관과 선죽교를, 그리고 공장을 둘러보고, 점심과 함께 반주로 백두산 들쭉술과 송악소주, 대동강맥주도 맛보았다. 돌아오는 길 차 속의 내 머리는 꽤나 복잡했다. 씁쓸하고 착잡하였다고나 할까. 6백여 년 전 불교문화가 찬란했던 고려왕국의 도읍지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그저 ‘무상(無常)’이외의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김형춘 향암 (창원전문대교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8년 1월 제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