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각 나라가 영토를 넓히기 위하여 전쟁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 초(楚)나라 역시 많은 전쟁을 겪었다. 22대 장왕(莊王)은 나중에 춘추5패의 한 사람이 된 뛰어난 임금이었는데 한 번은 그가 궁중 안에 있는 누각에서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문무제관이 참석하여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주흥을 즐기도록 한 것이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바람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갑자기 연회장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궁녀가 비명에 찬 목소리로 왕에게 아뢰었다.
“폐하 어서 불을 밝혀 제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잡아 주십시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제게 추행을 했습니다. 제가 그 자의 갓끈을 끊어버렸으니 어서 불을 밝혀 갓끈이 끊어진 사람을 잡아내 주십시오.”
장왕이 총애하던 애첩인 궁녀 하나가 이렇게 왕에게 고했던 것이다.
이 때 장왕은 뜻밖의 영을 내렸다. “불을 켜지 말라. 그리고 이 자리에 갓을 쓰고 참석한 제관들은 모두 갓끈을 끊으시오. 갓끈을 끊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불을 밝혀 문책하겠소.”
의외의 영을 내린 장왕은 애첩의 하소연을 듣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도량 넓은 마음으로 덕을 발휘해 애첩을 희롱한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버렸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생겨난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갓끈을 끊게 했던 연회’라는 뜻이다. 왕의 너그러운 아량에 의해 누군가가 신변의 위기를 모면하였던 것이다.
3년의 세월이 지났다. 초의 장왕은 이웃 진(陣)나라와 다시 큰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세가 크게 불리해져 장왕은 드디어 적군에 포위되어 패망직전에 몰려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였다. 적진을 뚫고 비호처럼 달려 나오는 장수 하나가 있었다.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사력을 다하여 왕을 구출하고 적을 격파하는 신출귀몰의 용맹을 떨치는 장수의 덕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서 전쟁은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장왕은 이 장수가 너무나 고마웠다. 친히 장수를 불러 치하를 하였다. 평소에 왕이 가까이 자주 보던 장수가 아닌 낯이 설은 장수였다. “그대 덕분에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내가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 치하하자 장수는 고개를 숙이며 조아렸다. “3년 전 저를 살려 준 은혜에 보답코자 했을 뿐입니다.”
이 장수가 바로 3년 전 절영지연에서 왕의 애첩을 희롱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름이 장웅(張雄)으로 알려진 장수였다.
세상이 야박하게 돌아가 관용과 용서가 없어지는 오늘의 세태에 큰 귀감이 될 수 있는 옛 이야기이다. 사람이 마음을 잘 쓰면 반드시 남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감동을 받은 마음은 의리를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덕을 베풀 때 자신의 인간성이 성숙되고 타인에 대한 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며느리가 나귀를 탔는데 시어머니가 고삐를 끈다”는 중국 수산성념(首山省念 : 926~993)선사의 공안이 있다. 어른인 시어머니를 태우고 젊은 며느리가 고삐를 잡아야 옳은 일인데 반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본래의 성품에서 볼 때 부처나 중생이 똑같아 높고 낮은 차이가 없다는 뜻을 드러낸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숨은 뜻이 있다. 그것은 상식에 안주한 윤리적 질서보다 누가 감동을 주는 마음을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당연히 시어머니를 나귀에 태우고 며느리가 고삐를 잡고 나귀를 몰고 가야 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몸이 좋지 않아 아픈 기색을 하고 있는 임산부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가 걱정을 해서 며느리를 나귀 등에 태우고 의원 집에 진찰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일이 된다. 며느리를 걱정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장면이라면 분명 젊은 며느리를 나귀에 태운 시어머니가 고맙기만 한 것이다. 감동을 주는 이 마음이 보배가 되는 것이지 나쁜 업을 짓는 마음이 어찌 보배가 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보배가 되도록 쓰는 일 이것이 바로 부처라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을 잘 쓰는데 있어서는 때로는 도식적이고 상식적인 관념을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상(相), 곧 관념적 고집에서 벗어나야 마음을 넉넉하게 쓸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마음을 넉넉하게 쓰고 살아야 한다. 언제나 마음의 여유를 두고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막히지 않는 시야처럼 그릇된 생각에 막히지 않고 살아야 한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2월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