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24) 모든 상대적인 두 가지의 견해는 진실로 짐작 때문이다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가지의 견해는 진실로 짐작 때문이다.

이변(二邊)이란 상대적으로 나누어진 양견兩見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말한다. 법은 본래 ‘이렇다 저렇다’는 양 갈래의 분별이 없는 것으로, 마치 허공 자체에는 동서남북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중생이 마음에 분별을 내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며 짐작하기 때문에 상대적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공연한 분별로 이것이 일어나면 대도(大道)에서 멀어져 버린다. 마음에 생각이 쉬어 짐작하는 지견(知見)이 없어질 때 중도실상이 나타나는 것인데, 지견에 지견을 거듭하여 세워 가는 것이 중생의 병이며, 그것이 바로 무명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몽환공화(夢幻空華)를 하로파착(何勞把捉)가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이란 실체가 없는 헛된 경계를 말한다. 즉 치우친 변견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객관의 대상이 실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헛꽃(空華)이란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바라볼 적에 그의 눈에 아물거리는 헛것으로 보이는 그것을 가리키지만, 이는 눈병탓으로 생긴 것이지 실제로 헛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인연 따라 생기는 것들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하였는데, 헛된 것을 잡으려 애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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