欲知兩段(욕지양단)인대 元是一空(원시일공)이니라
두 쪽을 알고자 할진대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은 원래 둘 다 하나로 공한 것이다. 물론 ‘공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일반적인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있다’라는 유(有)의 개념을 부정하는 상대적 공空이 아니라 유무(有無)가 동시에 끊어진 절대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되어지는 객체가 모두 헛된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본성의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는 생멸(生滅)이 없는 무생멸(無生滅)의 세계이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는 불사(不思)의 경계에 어찌 주객(主客)이 설 수 있겠는가?
중봉(中峰)은 다시 이렇게 송(頌)했다.
夢中睹得黃金藏(몽중도득황금장) 꿈 속에서 노다지 황금을 캐고
又跨靑鸞上寶臺(우과청란상보대) 푸른 봉황을 타고 보대에 올랐네.
盡夜喜歡無着處(진야희환무착처) 밤새도록 기뻐서 어쩔줄 몰랐는데
天明只落得場騃(천명지락득장애) 날이 밝아 깨어보니 멍청한 꼬락서니
一空同兩(일공동양)하야 齊含萬象(제함만상)이라
하나로 공한 것이 둘과 같아 가지런히 만상을 포함하느니
공하다 해서 공에 치우쳐 버리면 단멸공(斷滅空)이 된다. 또한 아주 없다고 일체를 완전히 부정만 하면 변견(邊見)에 해당되는 단견(斷見)이다. 그러므로 하나로 공해진 것이 둘로 양분된 것과 본질의 내용에서는 다름이 없이 같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로서 주객이 하나로 공해졌지만 공한 그 속에 주객이 부정되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공하다는 것은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있으면서 없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번듯이 존재하고 있지만 관법(灌法)을 통하여 보면 없다는 것이다. 관(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심으로 실천되어지는 수행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다.
허공이 삼라만상을 포함하듯이, 진공(眞空)이 묘유(妙有)를 머금고 있어 공관(空觀)으로 부정되어진 존재의 가상(假相)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 다시 살아나는데, 이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상의 제법은 공한 것이면서 그대로 연기된 모습을 가지는데, 이른바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은 공관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가관이다. 또한 공관과 가관이 서로 회통(會通)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하는데, 중관은 곧 중도이다.
중도를 나타내는 말에는 쌍차쌍조(雙遮雙照) 혹은 쌍민쌍존(雙泯雙存)이 있다. 즉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양면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객관의 경계에 부여해 놓은 개념이 어떠한 집착을 이룰까봐 이를 빼앗는 특이한 논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6월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