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제1절 (2) 요행수를 바라지 말라

둘째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자력(自力)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 까닭이 기도법을 몰라서라기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곧 기도를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수십 년을 절에 다닌 신도조차 요행수를 바라며 기도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도에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는다.

태양은 어느 곳에나 평등하게 빛을 준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빛을 받는 물체의 모습과 비례한다.

같은 태양 빛을 받는 사물일지라도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가 바르고, 형상이 길면 그림자가 길며, 형상이 짧으면 그림자가 짧은 법이다. 이처럼 불보살의 광명정대한 자비는 언제나 중생들의 정성과 함께 할 뿐, 요행을 바라는 마음과는 결코 함께 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요행수를 바라고 기도를 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측신(厠神)에게 기도하면 재수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변소에까지 밥을 가져가서 기도를 하고, ‘아무개가 족집게’라는 소문을 들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곳을 찾아가 점을 보기까지 한다.

사실은 신(神)이 내린 용한 점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하다못해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야지, 점을 보러 가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알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나’도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넘겨짚어서 하는 말일뿐이다. 그러므로 헛된 것에 의지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불자라면 불보살의 광명정대한 자비에 의지하여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치는 자력(自力)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점쟁이가 소원 성취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도를 한 번 해볼까?”

“내가 절에다 많은 돈을 시주했으니 부처님께서 봐 주겠지.”

이렇게 요행수를 바라는 기도는 마음에 때를 잔뜩 끼게 하고, 언젠가는 사도(邪道)로 빠져들게 한다.

나아가 진실한 불법은 10만 8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업장(業障)이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인 것이다.

정녕 지나치게 타력(他力)에 의존하여 자기 속까지 빼 주게 되면, 올바른 신심(信心)을 회복해 가지기가 매우 어렵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서 요행수를 떠난 자력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만 하면 업장은 저절로 맑아지고 복(福)은 저절로 찾아 들게 되는 것이다.

불자(佛子)들이여, 부디 명심하라.

부처님을 돌로 만들었든 쇠로 만들었든 나무로 만들었든 기도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도하는 장소가 사찰이건 집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지극 정성을 드리면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복은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부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신심 있는 기도를 하라. 신심(信心) 있는 기도를 할 때 환희심(歡喜心)이 샘솟고, 환희심이 생기면 신심도 더욱 확고해진다. 아울러 환희심이 가득한 곳에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고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신심 있는 자력의 기도, 이 기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 능력에 맞추어서 일심 지성(一心至誠)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요행수를 떨쳐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름지기 요행수를 버리고 참된 ‘나’의 신심을 다 바치는 기도를 하라. 이것이야말로 기도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비결이요. 기도를 통하여 해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요긴한 가르침인 것이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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