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의 ‘화’는 ‘말씀 화’자로서 말이라는 뜻이고, ‘두’는 ‘머리 두’자로 앞서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흔히 책의 머리말을 ‘서두’라고 하듯이,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달리 공안이라고 한다. 공안의 ‘공’은 ‘공중’,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은 곧 ‘방안’이다. 따라서 공안은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복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는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계합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백만억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이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바로 평생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방편이요, 약방문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은 아니니라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약방문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약방문만으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약방문을 보고 자기 병에 맞는 약을 지어 먹을 때에만 병은 낫게 되는 것이다.
설혹 팔만대장경을 다 외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약방문을 외운 것일뿐, 약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약방문을 모르더라도 약만 먹으면 병은 나을 수 있다. 그 약이 바로 언어 이전의 화두이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수행법이 그 약을 먹는 일인 것이다.
이제 화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가 동관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수행승 문원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無].”
이것이 화두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틀림없이 불성이 있고,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 ‘무’라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주선사가 엉뚱한 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조주선사의 깨달은 경지에서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요, 언어 이전의 참된 답을 일러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확실히 알면 그는 조주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곧 조주선사와 하나가 되어 대오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두법에 의지하여 가장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 머리를 굴려서 얻는 해답으로는 안된다.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의심의 삼매 속에 들어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무’라고 하였는가?”
“틀림없이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조주선사는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인가?”
“무?”
“?”
이렇게 의심을 일으켜 끊임없이 해답을 구하여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선종에서 최초로 나온 화두, 선종제일공안인 ‘영산회상거염화’는 우리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화두이다.
어느날, 부처님께서는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꽃을 뿌려 공양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 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나 한자리에 모인 수만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무슨 뜻으로 꽃을 들었는지를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해 하였고, 오직 부처님의 큰제자인 대가섭존자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선언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전하여 주노라.”
이 말씀 중 아래의 정법안장에서 견성성불까지의 선종팔구를 연결시켜 번역하여 보자.
모든 정법 중의 눈알과 같이
열반에 들어가는 묘한 마음의 도리는
실로 모양이 있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미묘한 법문이기에
언제나 문자로는 설명될 수 없어
교법 밖에서 따로 전하노니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케 하노라
꽃을 들고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선종팔구의 선법이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종제일공안 가운데,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까닭’을 밝히는 것이 바로 화두법이다.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영산화상에게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부처님은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꽃을?”
“어째서?”
“?”
이와같은 “?”, 이와같은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대의단을 갖는 것,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이 화두는 마치 열쇠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자식을 장가 보내고 시집 보낼 때 장농을 사주고 집을 사주었지만, 요즘은 아들이나 딸을 시집 보내고 장가 보낼 때 열쇠 하나만 준다고 한다. 열쇠만 가지고 가서 아파트 문을 열면 그 안에 모든 살림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도 하는데, 그처럼 “어째서 부처님께서 꽃을 드셨는고?”, “왜 무라고 했는가?” 하는 이 열쇠, 이 물음표(?)라는 열쇠를 가지고 문만 열면, 팔만 사천 법문과 무진장의 보배가 가득 차 있는 마음자리를 되찾아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적당히 알아서 될 일도 아니요, 그냥 재미로 할 수 있는 공부도 아니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