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의 근원(根源)
그 다음 또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형해지색(形骸之色) 사려지심(思慮之心)이, 내 몸을 구성한 이런 색(色)이나, 생각하는 내 마음이나 이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
형상이 있고 뼈가 있는 것이니까 역시 우리 몸뚱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말합니다.
‘종무시래(從無始來) 인연력고(因緣力故)로, 무시(無始)로 좇아오면서 인연의 힘인 고로’
무시란 처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끝도 갓도 없는, 한계없는 시초부터서 인연의 힘인 고로, 인연이란 굉장히 의미심중한 말입니다. 일체법의 직접 간접 원인을 다 포함시킨 것이 인연입니다.
‘염념생멸(念念生滅)하여 상속무궁(相續無窮)이라, 찰나찰나에 쉬지않고 생(生)하고 멸(滅)하면서 서로 계속僅서 다함이 없는 것이다’
염념(念念)은 생각생각 또는 순간순간 찰나찰나를 말한 것입니다. 내몸이나 내 마음은 무엇인고 하면, 끝도 갓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서 업력 기운이 조금도 쉬지 않고서 순간순간 죽었다 살았다 자꾸만 계속해 오면서, 끊어지면 무엇이 안 되어버릴 것인데 서로 상속(相續)해서 서로 계속해서 끊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수연연(如水涓涓)이요 여등염염(如燈焰焰)이라, 마치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과 같고 마치 등불이 타올라가는 거와 똑같다’
하나가 떨어지면 물방울이겠지만 자꾸만 안 쉬고 떨어지면 비가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역시 세포 하나하나가 모였지만 이렇게 많이 모이니까 하나의 형체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이나 마음이 구성되는 것이, 물방울이 안 쉬고 떨어져 비가 되듯이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거와 같습니다. 또한 엄밀히 보면 불꽃이 한번 타올라가고 그 뒤에 곧 타오르고 하는 것인데, 자꾸만 계속하니까 우리가 하나의 불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물방울도 방울방울 따로 있는 것인데 줄곧 계속하니까 하나의 물줄로 보이고, 등불도 불꽃이 타오르고 또 타오르는 것인데 자꾸만 타오르니까 하나의 불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횃불을 돌리면은 불바퀴로 보이지요, 그것이 불바퀴가 아닌데도 연속으로 빙빙 도니까 불바퀴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각 세포가 모이고 모여 구성한 것인데, 이같이 많이 모이고 계속 움직이니까 하나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성(構成) 문제요, 아주 깊은 철학적인 문제이니까 수십번, 수백 번 읽으며 이것을 의지 할수록 ‘정말로 무아(無我)구나’ 이렇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신심가합(身心假合)하여 사일사상(似一似常)이라, 몸과 마음이 잠시간 화합(和合)되어서, 하나 같고 항상(恒常)같다’
사실은 하나가 아니고 항상이 아닌데, 몸과 마음이 잠시간 합해있기 때문에, 하나같이 보이고 항상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범우불각지(凡憂不覺之)하고 집지위아(執之爲我)라, 어리 석은 범부는 이것을 깨닫지 못해가지고서, 집착해서 나라고 고집한다’
마음과 몸이 잠시 모여지고, 또 몸은 내나야 각 공무더기가, 세포가 모인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마음도 역시 마음의 흔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곳에서도 지금 마음이 안 보입니다.
달마(達摩) 대사 하고 2조(二祖) 혜가(慧可 487∼593) 대사하고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조 혜가 스님이 “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어떻게 좀 제도(濟度)해 주십시요” 그러니까, 달마 스님이 “그러면 그대 마음을 내놓아봐라” 하셨습니다.
불안스러운 마음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무슨 형체 가 있습니까,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한테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리 찾아봐도 불안스러운 마음이 없습니다” 달마 스님께서 “그러면 너를 제도해 마쳤노라”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에가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병(病)이 일어납니다. 마음병, 몸병이 말입니다. 어리석은 범부가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서, 이런 가짜로 임시간 화합된 그것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서 이것을 ‘나다’ 이렇게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보차아고(寶此我故)로 즉기탐진치등삼독(卽起貪瞋痴等三毒)이라, 이내가 보배같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곧,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등 삼독심이 발동한다’
한번 고집하면은 나같이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살인죄나 무엇이나 탐심, 진심 모두가 결국은 내가 좋다고 생각되니까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를 보배라고, 보배같이 생각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貪心), 나한테 싫게 하면 진심(瞋心), 이러한 사리(事理)를 바로 못 보는 것이 치심(痴心) 아닙니까, 내가 있다고 하면은 바로 즉시에 내 소유(所有)라, 내가 있으면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있고, 내 동생이 있고, 모두 다 내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 애착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이것은 독심(毒心)입니다. 범부는 그것이 독한 마음인 줄 모릅니다. 독심, 그것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자기 몸도 해칩니다.
‘삼독격의(三毒擊意)하여, 발동신구(發動身口)하고, 조일체업(造一切業)이라,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이 우리 마음을 더욱 더 자극하여 우리 몸과 입으로 발동(發動)을 일으키고, 일체 업을 짓는다’
미워지면 때릴려고 하겠지요, 미워지면 죽일려고 하겠지요, 욕설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우리가 일체 업장(業障)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원인론(原人論)이라 하여, 인간의 근원을 위대한 도인인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가 말씀한 것입니다.
저는 경론(經論)을 많이 안 봤습니다마는, ‘내가 없다’ 는 말씀을 한경론 가운데서 이같이 절실하게 말한 대문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한번 더 제가 설명합니다.
‘사람 몸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인아(人我)라 하고, 일체 만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 몸은 물질과 정신인 색, 수, 상, 행, 식 오온인데, 이러한 것이 가짜로 잠시간 화합되어 있는 것이 몸이므로 항상 하나인 내 몸의 체(體)가 있을 리가 없으며, 일체 만법은 모두가 무수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되었으므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의 아(我)라는 성품이 원래 없다’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입니다. 아공, 법공을 느껴야 비로소 공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었다는 아공을 느끼고서 법공을 못 느끼면, 소승(小乘)이고, 대승(大乘)은 아공, 법공을 다 느껴야 대승인 것입니다.
그다음 법문은,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하고 집요하게 고집한다. 그러나, 지혜로써 이것을 관찰하건대 정말로 내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나라는 것이 대체 어느 곳에 있는가? 해서, 머리부터 발까지 마디마디를 일일이 세밀하게 자세히 관찰해 보아도 마침내 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느 곳에 사람이나 또는 중생이 있는고? 이것은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잠시간 공의 무더기를, 각 세포를 만든다’
저번에 말씀마따나, 천지창조 역시 중생의 업으로 해서 만든 것입니다. 불경에서 보면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라, 하나의 중생이 아니라 무수한 중생의 생각하는 생명의 힘 즉, 공업력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를 만들어 가지고서 천지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잠시간 공무더기가 되어가지고서 여러 가지 인연 따라서 태어났다. 따라서 사실은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텅 빈 정자(亭子)에 머문 것이나 같다’
우리는 설사 고집을 한다하더라도, 역시 주인이 없는 정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인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집착이 안 생기겠지요.
그 다음 법문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이런 몸뚱이나, 또는 생각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끝도 갓도 없는 과거로부터서의 인연의 힘 때문에, 찰나찰나 생하고 멸하면서 끝없이 서로 이어 왔다. 마치 그것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거와 같고, 또는 마치 불꽃이 염염이 타오르는 거와 같다. 이같이, 몸과 마음이 잠시간 화합되어서 하나같이 보이고 또는 항상 있는 것같이 보이니까, 어리석은 범부가 이것을 깨닫지 못해가지고서 이것을 나라고 고집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가 보배롭고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곧,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이런 삼독심을 일으킨다. 삼독심이 다시 또 우리 의식을 격발(擊發)시켜서, 우리 몸이나 입으로 발동해서 일체 업장을 짓는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이제 내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역시, 우리는 좀체 나를 못 뗍니다. 역시 내가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淸潭